문인 일화(ㅈ-ㅎ)

황동규(1938-, 평남 영유)

톰소여와허크 2010. 8. 30. 22:30

황동규(1938-, 평남 영유)

 

 97년 ‘즐거운 편지’를 인용한 두 편의 영화([편지],[팔월의 크리스마스])가 화제를 모으면서, 50년대에 세상에 나온 이 시는 때 아닌 ‘특수’를 탔다. 영화 개봉 이후 이 시가 실린 시집이 베스트셀러 순위에 다시 진입하는 이변도 벌어졌다. 황동규 시인의 반응은 담담했다.

“영화 <편지>가 개봉됐을 당시에 전 미국 버클리대학에 있었어요. 그래서 영화에 제 시가 나왔다는 것도 몰랐죠. 그런데 오후 6시쯤이었나. 한국에서 신문사 기자가 전화를 하더니 대뜸 ‘황선생님, 시가 떴습니다’하더군요(웃음). 시에 대해 물어오길래 고등학교 교지에 실린 이 시를 쓴 건 고 2 무렵이었고, 한 살 연상의 여인을 짝사랑해서 쓴 거라고 시에 얽힌 뒷얘기를 들려줬지요.”

 황동규 시인은 일제치하인 1938년 평안남도 영유군 숙천에서 소설가 황순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평양에서 40리 떨어진 대동군의 재경초등학교 1학년 때 해방을 맞는다. 이듬해 가족이  모두 남하했다. 아버지가 교사로 재직하던 서울고등학교 사택에서 살면서 덕수초등학교에 입학했다. 현재의 경복궁 자리인 서울고의 그림같은 풍경 속에서 유년을 보내고 서울고에 진학한 그는, 그 후 서울대 문리대에 수석 입학한다.

 스무 살 무렵. 서울고 재학시절 교과서나 노트 없이 빈손으로 학교를 다녔다. 문우이자 고교 동창생인 시인 마종기와 밤샘 시험공부를 할 때도 타고르나 예이츠의 영문시집을 읽으면서 먼저 잠자리에 들곤 했다. 그러고도 전교 1, 2등을 다투던 이 수재는 급기야 스무 살에 등단한다.  대학 2학년 때 『현대문학』에 시「시월」이 추천되었고, 이어 고교 졸업 무렵에 쓴 「즐거운 편지」「동백나무가 추천되어 문단에 공식 데뷔하게 된다.

 이 무렵 황동규 시인은 삶과 문학에 덤비듯 살던 때였다. 돼지뼈 감자국에 소주면 저녁 내내 행복했고, 주머니 속에 갓 뜯은 담뱃갑 하나만 손에 만져지면 돈이 없어도 마냥 흡족했다. 누군가가 생명과 좋은 시 한편을 쓰는 기쁨을 바꾸겠냐고 물으면 선뜻 응했을 것 같다고 추억하는 그 시절. 그는 청년 특유의 열정과 따뜻한 감성으로 한국 전쟁 직후의 황량한 세계와 정열적으로 맞대응하면서 초기 시편들을 일구어나갔다. 전형적인 모범생이면서 솔직한 도시인 황동규는 과격한 모더니스트가 되지 않기 위해, 치졸한 감상주의자로 안주하지 않기 위해 싸운다. 윤동주, 김소월, 미당 서정주와 김춘수, 김수영, T.S. 엘리어트, 예이츠, 두보를 지나왔다.

 이후 국비장학생으로 영국 에든버러대를 수학한 그는 1968년부터 현재까지 서울 문리대 영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이순(耳順)을 넘어선 이즈음에도 대가연하지 않는 걸로 유명하다. 그에게 대가란 호기심을 잃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에 다름 아니다. 호기심이 없는 시인이란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 않은가? 그런 연장선에서 또 하나의 일화. 그는 행사시를 쓰지 않는다. 주문대로 써줘야 하는 시는 시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그도 딱 한 번, 하도 간곡하게 권해서 행사시를 써준 적이 있다. 성탄 기념시를 써 달라길래, "예수님은 여자들의 애정을 독차지 하더니 그도 모자라 남자들한테까지 사랑받는다"고 썼다. 물론 실리지 못했다.

 시인이 되기까지 아버지 황순원의 영향도 컸다.

“제가 고등학교 때 성적이 참 좋았습니다. 다른 집이었다면 법대 아니면 의대 가라고 했을 거예요. 그런데 아버지는 문리대를 가겠다는 제 말을 눈을 감고 들으시더니 ‘후회하지 않을 길이면 가라’고 말씀해주셨죠. 그래서 문학의 길을 갈 수 있었습니다."

 일제 식민지 말엽, 가갸거겨를 가르쳐 주시는 아버지에게 황동규는 자신도 동네 아이들처럼 히라가나를 가르쳐달라고 졸랐다. 아버지 황순원은 울었다. 지금도 황동규는 그 눈물의 의미가 잊혀지지 않는다고 한다. 문청시절, 술 먹고 늦게 들어오면 늘 아버지 방에 불이 환했다. 그 환한 전등불은 준열한 가르침이었다. 그런 아버지를 사랑하면서 아버지를 넘어서기 위해 고투해왔던 시절에 대하여 그는 별 말이 없다. 이제, 황순원의 아들 황동규가 아니라 시인 황동규인 까닭이다.

 황동규는 여행을 좋아한다. 그래서 그를 '여행의 시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여행을 그 무엇보다 좋아하고 가끔은 무작정 간다. 그에게 여행은 시 쓰기와 다르지 않다. 구체적 일상 속에서 시의 대상을 정하면 시는 너무 익숙해진다. 범상하게 지내던 사람이 갑자기 새롭게 보이는 순간과 같은 빛나는 느낌을 전해줄 수 없다. 그래서 그는 '낯설게하기'라는 기교를 즐겨 쓴다. 술술 읽혀져서 고여 있는 시보다 반항하고 튕기어나가는 시어들. 그래서 독자를 잡아당기는 시를 쓰고 싶어 한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여행이야말로 얼마나 낯선 것 투성인가. 낯선 곳에서 그는 삶을 깨닫고 그 깨달음은 그를 거듭나게 한다.

 그의 산문집 <젖은 손으로 돌아보라>에는 봉암사, 한계령, 변산반도, 백령도 등 우리나라 방방 곡곡을 헤집고 다닌 여행의 궤적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고 2때부터 여행을 즐겼죠. 여행은 일상에 꽉 막힌 숨통을 틔게 해줘서 좋습니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땅덩어리는 좁지만 예쁜 곳이 너무 많아요. 제 시에 여행지나 여행의 추억이 많이 등장하는데, ‘여기 갔다 와서 시 써야지’ 마음먹고 떠난 적은 없습니다. 그냥 떠났는데 나중에 여행이 시가 되는 경우는 많았지만요.”

 그의 여행 동료들은 대부분 글 쓰는 후배들이다. 평론가 김명인, 하응백, 그리고 조정권, 김윤배 시인들이 단골 여행 멤버. 시인끼리 여행 가면 무슨 얘기할까 궁금한데 그 대답이 기가 막히다.

“거기까지 가서 촌스럽게 시 얘기를 왜 합니까? 하지만 거기서 아름다운 장면을 만났을 때 내뱉는 우리들의 반응 자체는 각각 한 편의 시라 해도 좋겠지요.”

 그가 그렇게 아낀 후배 중에는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 평론가 김현도 있다. 그보다 3살 아래인 김현은 1년에 두 차례씩 꼬박꼬박 여행을 함께 다닌 막역한 사이였다.

“문학관은 달랐지만 참 좋은 친구였지요. 여행도 함께 많이 다녔어요. 김현이 죽었을 때 전 네 명의 친구를 잃은 셈입니다. 학교동료이자 술친구를 잃었고, 또 문학하는 동료이자 여행 친구를 잃었어요.”

 김현 외에 문우로는 미국 오하이오주에서 의사로 활동 중인 시인 마종기를 꼽을 수 있다. 서울고등학교 동창생인 마시인은 한때 작곡가가 되고 싶었던 황시인에게 자신이‘발성음치’임을 깨닫도록 해 진학의 꿈을 가차없이 접도록 만든 친구이기도 하다.

 <어떤 개인 날>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 <몰운대행> <버클리풍의 사랑 노래> 등 총 10권의 시집을 내고 현대문학상, 이산 문학상, 대산 문학상 등 6번의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한 황시인. 그의 시세계는 넓고도 깊다. 대중들이 사랑하는 <즐거운 편지>나 <조그만 사랑의 노래>와 같은 ‘연애시’도 있지만 그 동안 그의 시세계는 한 군데에 안주하지 않고 늘 변화해왔다. 문학평론가들이 그를 가리켜 ‘현재 진행형의 시인’ 혹은 ‘여행의 시인’이라 부르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언어를 조탁하며, 시를 다뤄온 지가 40년이 넘지만 그는 아직도 시를 컨트롤하는 법을 모르겠다고 한다. 짧은 시는 그나마 마음 먹은 대로 써지지만, 긴 시를 쓸 때는 자신의 마음과는 다른 방향으로 가겠다고 버티는 시가 태반이라고.

“전 이 방향으로 가려는데, 자꾸 시는 저 방향으로 가는 거죠. 그거 진짜 골탕 먹는 기분입니다”

 황동규 시인은 그를 시인으로 추천, 등단시킨 미당 서정주에 대해서도 의견을 밝혔다.

“미당이 죽고나서 평가 작업이 활발하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은 그래요. 미당의 과거지사 문제를 들먹이며 미당의 시를 비판하는 건 불경이라고. 그게 말이 됩니까? 예전에 ‘왜 친일을 했느냐?’라고 미당에게 질문했을 때 이 양반이 이렇게 답한 적이 있어요. ‘난 일본이 이길 줄 알았다’. 이게 핵심이에요. 이 양반은 항상 이랬거든요. 미군정 때도 6·25 때도 그랬어요. 만약 미당이 유교나 기독교 혹은 실존주의, 이런 윤리관을 가지고 있었다면 친일이니 5공 찬양이니 이런 문제가 발생하질 않았을 거예요. 그런데 미당은 샤머니즘적인 그의 시처럼 윤리관 또한 샤머니즘에 기대고 있었던 거죠.”

 그는 미당이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세배를 다녔다. 그를 시의 세계로 이끌어준 스승에 대한 예우 차원이었다. 그러나 발길마저 뚝 끊었던 적이 있었다. 미당이 5공화국을 칭송하는 등 ‘변절’의 행동을 뼈아프게 보였던 때였다. 당시 같이 세배하러 가던 고 김현은 그 일로 발길을 끊었고, 죽을 때까지 다시는 미당을 보지 않았다고 한다.

 황시인은 슬하에 1남 1녀를 두고 있다. 딸은 결혼해서 미국에서 음악 공부를 하고 있고, 아들은 홍익대 기계과에 재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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