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작성 시각 : 2002.01.05 22:48:41
<박하사탕>
<박하사탕>은 터널 속과 철로 위를 지나는 무서운 속도로 지나는 기차와 함께 한 인물의 인생여로를 숨가쁘게 되짚어 가고 있다. 인생의 중요한 전환기를 단막단막 끊어 처리하면서 그 간격을 철로로 이어가면서 자연스런 연결을 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두 주인공은 십대 후반의 젊음을 가리봉동 공단에서 보내는 노동자였다. 둘은 직장 야유회에서 서로 간의 순수한 마음을 교감한다. 박하사탕을 포장하는 일을 하는 여주인공은 들판의 야생화를 사진에 담고 싶어하는 남주인공의 순수한 면을 사랑하게 된다.
남자는 곧 군에 입대한다. 편지에 박하사탕 하나씩 넣어보내며 미래의 꿈에 젖어드는 여자의 소망은 깨어진다. 남자에게 잇달아 닥쳐온 충격적 사건 때문이다. 그 하나는 80년 광주에서 시위 진압군이 되어 여학생을 오발사고로 죽인 일이다, 제대 후에 남자가 경찰이 되면서 겪는 일들은 삶에 대한 갈등을 더욱 증폭시켰다.
남자는 시위 학생과 노동자를 고문하는 데 능숙한 형사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삶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학생을 고문하며 삶의 추악한 면을 현실로 받아들인다. 그런 자신의 모습이 예전의 순수한 영혼을 간직한 그녀와 맞지 않다고 생각하고 그녀를 돌려보낸다. 그녀에 대한 연정과 쓰라린 자기모멸을 뒤로 하고.
이후 그의 삶은 평범했지만 파멸의 길로 조금씩 다가서고 있었다. 사랑 없는 결혼 속에 아내의 불륜을 목격하고도 순간적인 흥분과 광기를 보인 후 자연스럽게 아내를 대하고, 그날 여사원과 섹스를 하는 모습은 사랑이 없는 삶의 황폐함을 여실히 드러낸다. 어쩌면 자신이 선택한 삶에 대한 체념이라고도 보여지는 데, 그 이면에 선택을 강요받은 면에 대한 분노도 느껴진다.
친구에게 사기 당하고, 아내와 헤어진 후 자포자기적 삶의 끝에서 사랑했던 그녀의 죽음을 접하게 된다. 처음으로 예전의 순수한 사랑을 떠올린 그는 철로에서 처절한 절규와 함께 생을 마감한다. 치유될 수 없을 만큼 황폐해진 그의 삶은 과거로도, 미래로도 갈 수 없기에 가장 현실적인 선택을 한 셈이다. 20년전 박하사탕같은 깨끗한 사랑을 떠올리며, 진정 미칠 수 없었기에 죽음을 택한 것이다.
한 시대가 한 인간에게 순수파괴라는 독소를 심어주고 지나갔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80년대의 아픔을 고발한 영화라고 볼 수 있겠다.
영화를 보고 난 다음 책 모서리 어디엔가 이렇게 적었던 것 같다. -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섬뜩하게 떠올려보게 하는 영화였다고. 아니면, 그저 박하사탕 먹고 싶다고 적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