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작성 시각 : 2003.01.31 12:18:05
- 영화 '영웅'은 내용면이나 영상면에서 생각하고 볼 만하게 많았다. 내용을 좇아가보자.
천하통일의 염원을 실현시켜나가는 진나라 영정(후의 진시황)은 그 과정에서 수많은 적들을 만들었다. 진의 세력이 커지고 영토가 확장되면서 조국과 부모,동료의 원수를 갚기 위한 자객들의 암살기도가 가열차게 이어졌다. 하지만 철통 같은 경비 속에 자객과 자객을 보낸 집단들의 꿈은 하나씩 꺾이어 갔다.
그 중에서도 영정의 목숨을 노리다가 실패해서 현상금이 걸린 자객 세 명(장천,파검,비설)은 의로움이나 무예로 소문이 자자했다. 이들을 차례로 해치운 변방 출신의 자객 무명이 공로를 인정받아 영정에게 10보 내로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짐작했겠지만, 세 명의 희생은 영정에게 접근하기 위한 고육지계(적을 속이기 위해 제 몸을 희생)였다. 이제, 10보 필살기를 익힌 자객 무명에게 영정은 목을 내놓아야 할 판국이었다.
그런데 자객 무명은 그 결정적 순간에 행동을 주저하게 된다. 이번 거사를 막은 동료의 뜻을 헤아렸기 때문이었다. 붓과 검으로 최고의 경지를 이른 동료 파검이 바닥에 그린 '천하'라는 두 글자의 의미와, 조국과 부모의 불구대천의 원수라는 명분 사이에 갈등하던 무명은 결국, 영정을 해치우지 못했다.
천하를 통일하고 화폐를 하나로 하여 천하를 경영하는 것이, 소국으로 나뉘어 끊임없이 분쟁하고 민생을 어지럽게 하는 것보다 낫다고 판단했던 동료의 뜻을 받아들인 셈이었다. 또한 생사 여탈권을 맡긴 영정의 의연함과 '검'의 글귀를 깨달은 영정의 현명함을 높이 샀기 때문이기도 했다. 검을 마음먹은 대로 움직이는 '신검합일'의 경지보다 검을 잡지 않는 '포용정신'을 우위에 두는 영정의 역량을 믿은 것이었다.
등을 돌리고 나가는 자객 무명을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린 영정은 그에게 '영웅'이라는 칭호를 붙여주었다. 영웅과 영웅이 서로를 인정한 꼴이었다.
이후 영정은 춘추전국시대를 끝내고 천하를 통일했으며, 스스로를 시황제라고 칭했다. 통일시대가 이전 시대와 다를 바 없이 무리한 공사 등으로 백성들이 시달렸다는 게 일반적인 시각이고 보면, 시황제가 초심(통일을 하겠다는 원뜻)을 잃은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일부 대단한 영웅들은 보다 큰 대의를 위해 사소한 잘못이나 불법(살인, 전쟁 등)을 저지를 수 있다는 생각에도 선뜻 동의하기가 어렵다.
영웅은 민중의 열망이 만들어낸 피조물이다. 그러니 한쪽의 영웅은 다른쪽의 역적일 수도 있다. 소망의 대리인으로 영웅을 내세워 민중의 아픔과 억울함을 푸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절대화된 영웅이 오히려 우리 삶을 황폐화시킬 수도 있음을 생각해야겠다.
앞으로는 영웅의 시대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의 시대가 와야 할 것으로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