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책)

<에세이> 자전거 여행

톰소여와허크 2010. 8. 31. 11:08

글 작성 시각 : 2003.06.12 22:31:25

김훈, 자전거 여행, 생각의 나무, 2000

내가 자전거를 처음 탄 것은 초등학교 삼학년 때였다. 아동용 자전거가 아니라, 어른용 짐 자전거였다. 다리가 짧아서 안장 위에 올라가 페달을 밟는 것은 무리였다. 안장 밑으로 다리를 집어넣어 자전거와 수평이 된 채 위태롭게 앞으로 나아갔다. 이듬해였을까. 다리가 길어졌는지, 안장 위로 올라가 비로소 균형을 잡고 앞을 똑바로 내다볼 수 있었다. 초등학교 오학년 때 칠성시장 노점에서 하얀 페인트를 입힌 미끈한 자전거를 직접 샀다. 보물 1호였다. 어느 날 슈퍼 앞에 세워두었던 나의 보물은 사라졌다. 나는 불운에 울었고, 세상에 대한 저주로 한 때를 소모해야만 했다.
자전거가 없는 지상에서의 내 삶은 어둡고 비리비리한 것이었다. 오랜 후, 새로 산 자전거를 타고 지상에서 두 발을 떼는 순간, 나는 자유롭고 당당해졌다. 자전거는 내 욕망을 함께 태우고 청년시절을 지나왔다. 이카루스는 하늘의 끝을 보고자 태양을 향해 날았지만, 나는 무얼 향한다는 방향도 없이, 오직 떠나고 있다는 해방감으로 집에서 학교로, 학교에서 집으로, 골목에서 큰길로, 큰길에서 골목으로 지나왔다. 이카루스의 욕망은 아름답게 추락했지만, 나의 욕망은 아직까지 골목을 벗어나지 못하고 헤매고 있다. 먼길을 다녀보지 못한 내 자전거는 바람 빠진 타이어를 내보이며 추레한 몸뚱이를 벽에 기대고 있다.
김훈의 <자전거 여행>은 먼길 다녀온 여행의 기록이다. 책 표지를 넘기면 사진 한 장이 전면을 채우고 있다. 눈 덮인 겨울 도마령을 홀로 넘어가는 자전거를 탄 김훈. 산길에 점처럼 찍힌 그의 모습이 외롭고 높아 보여서 부러움이 생긴다. 김훈은 자전거와 한몸이 되어 거친 숨을 몰아쉬고, 살아있음을 한껏 증명하고 있다. 더욱이 내리막의 속도가 그의 가슴을 부풀리게 할 것이고, 산 너머 낯선 세계가 그의 심장을 요동치게 할 것이니, 내가 부러워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카루스가 날개를 달고 비행하듯, 김훈은 풍륜(자전거 이름)을 타고 달린다. 추락이 예비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풍륜과 그의 주인은 마냥 행복해 보인다.
김훈은 여수 돌산도 향일암에서 동백꽃을 구경하기도 하고, 만경강 하구 갯벌 위로 새들이 돌아오고 떠나는 광경을 저물도록 바라보기도 한다. 섬진강 가에서 하동 재첩국을 맛보기도 하고, 선암실 화장실에서 똥 누고 앉아서 이곳이 자유의 낙원임을 말하기도 한다. 영일만 근처 포구 마을 좌판에서 멸치회 3천 원어치만 사면 셋이면 충분히 먹는다고 유혹하기도 한다.
김훈의 자전거 여행과 그 기록이 풍광과 먹거리만 쫓아갔다면 나의 부러움은 일시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김훈의 기록은 삶에 가까이 있고, 인간의 땀냄새 살냄새를 담뿍 담고 있다. 광주 망월동을 지날 때, 군홧발에 채인 임산부와 유방 밑에 총상을 입은 할머니가 그 이후의 삶을 어떻게 살아냈는가를 말한다. 임실군 운암면 옥정호를 지날 때, 공장 부도내고 고향에 돌아온 김 씨가 은행 이자 3천만 원을 갚기 위해 얼마나 애쓰는가도 이야기한다. 사람 사는 일만큼 강하고 소중한 풍경이 있을까. 자전거를 타고 산을 넘어가면서 또 다른 세계에 대한 황홀경만 그리는 건 사치이다. 김훈의 여행은 사치스럽지 않아서 좋다.
'갈 수 없는 모든 길 앞에서 새 바퀴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라고 김훈은 말했다. 갈 수 있는 길도 못 가는 내 쓰러진 청춘의 자전거를 다시 세워야겠다. 오는 주말엔 바람맞으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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