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일화

이인성(1912∼1950, 대구)

톰소여와허크 2010. 9. 4. 11:59

이인성(1912∼1950, 대구)

 

이인성은 1912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무위도식했던 취객으로 자녀 교육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그의 형제들은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 없었고, 그 역시 보통학교를 5살이나 늦게 입학했다. 가정불화가 그치지 않았던 집안에서 자란 이인성은 어린 시절부터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몸부림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려운 가정 환경에도 불구하고 그는 천재적인 능력을 발휘하며 일찌감치 화가로서의 명성을 떨쳤다.

"나의 과거를 돌보아도 역시 이해 없는 환경이었으며 경제로 말하여도 구속을 받았다.
나의 부친은 한시와 서도를 주장하고 회화에는 절대 반대를 가지고 그야말로 '몽둥이'를 가지고 나올 지경이었다. 그러니 자연 경제에도 구속을 받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여 보니 여러 가지 '우스운 일'도 많았다. 짤막한 이야기를 하면 어느 일요일 아무리 하여도 야외사생 가고 싶은 마음을 참을 수 없어서 뒷방에서 가만가만히 준비를 하여 가지고 뒷담을 뛰어넘어 산격동(山格洞)이라는 곳으로 가서 기쁜 마음으로 하루 종일 사생을 하고 집에 돌아오니 부친께서는 벌써 아시고 기다리다가 그만 붙잡혀서 화상(畵相)이며 화필(畵筆)이며 모조리 분지르는 중에 그림 그린 것만 가지고 도망가고 말았다. 그 그림을 세계아동작품전에 출품하여 특선을 받았으나 다만 나 혼자 기뻤다. 부모는 도리어 노하실 때 서러운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조금도 낙망(落望)치 않고 도리어 의지 굳게 노력하여서 조선미전에 <음(蔭)>이라는 작품을 출품하여 당선 영(榮)을 받았다. 그 후부터는 호랑이 같은 아버지도 이해를 가지게 되며  따라서 나는 새로운 웃음과 의지를 가졌다." 『신동아』제 39호(1935.) 에서 발췌


그는 10대의 나이에 조선 미술전람회에 입선했고, 20대 초반엔 연속 4회의 특선을 차지하며 화단에 돌풍을 일으켰다. 더욱이 보통학교밖에 다닐 수 없었던 가난한 주변 환경이 있었기에 그의 이 같은 업적은 더욱 높게 칭송되었다.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인성은 그림에 대한 열정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주변 유지들의 도움으로 동경 유학을 하였는가 하면, 26세가 되던 해에는 조선미술전의 추천작가가 될 정도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17 세의 나이에 보통학교를 졸업한 그는 가정 형편으로 진학을 하지 못하고 서동진이 경영하는 대구 미술사에 입사를 했다. 이후 1931년에는 일본 태평양 미술학교에 입학하며 본격적인 미술 공부에 열을 올렸다.

이인성이 화단에 화려한 데뷔를 하던 1930년대에는 우리나라의 서양화가 정착 단계에 이르고 있었다. 이 시기에 이인성이 추구한 작품 세계의 근간은 수채화에 있었다. 그는 수채화를 통해 독특한 회화적 감성을 익히며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모색했다. 분할적인 묘법과 경쾌한 구성, 여기에 이인성은 설화적이고 목가적인 내용들을 가미하면서 서정주의적인 전통을 확립했다. 1939년 이인성은 한 후원가의 도움으로 대구 시내에 아틀리에를 마련했다. 이 무렵 그는 가장 안정된 생활을 하며 화가로서의 삶에 충실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1940년 첫 번째 부인의 죽음으로 그는 술에 몰입하게 되고, 자신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비정상적인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이화여고와 이대 미술과 등에서 학생들을 지도하며 술과 그림에 몰입했으나, 1950년에 결국 국내 화단에 많은 아쉬움을 남긴 채 목숨을 거두었다. 격동기와 혼란과 갈등을 극복하기 위해 저항의 행동으로 인한 비명이었다. 하지만 그가 죽은 이후에도 그를 추종하는 많은 모방자와 아류들이 성행했을 정도로 그가 서양 화단의 중심에 선 화가였음은 분명하다.

 "나는 대작을 할 때마다 화실에 걸린 그림을 전부 떼어 정리하고 넓은 '흰 벽'을 수일 동안 바라보는 행습이 있다. 이것은 나에게는 유일한 마음의 낙(樂)인 동시에 행복이었다. 가끔 집안 식구들이 미친 사람이라고 말할 때도 있으나 그런 소리에는 하등의 노심(努心)도 없고 오로지 다행이라고 생각될 뿐이다. 나의 생명인 화실을 버리고 서울에 와서 '강짠지'와 '동탯국'을 먹기 시작한지 벌써 7년 간이라는 세월이 어제같이 꿈으로 돌아가고 공간 있는 '흰 벽'을 보지 못하니 자연히 마음이 괴롭고 자유를 빼앗긴 자와 같다. 자유를 빼앗기고 보니 남은 것은 악(惡)뿐인 듯 하다. 그러나 이 '악'은 아직까지 '코리겠다'는 의지에서 오는 나의 정열임에 틀림없는 강한 의지일 것이라고 스스로 위안한다. 나는 매일 '흰 벽'이 있는 공간을 보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볼 수 없는 괴롬에서 헤매임은 사실이다. 조그마한 실내에서 그림을 그릴 때마다 옛 화실이 불끈불끈 생각에 치바쳐 괴로운 심경에서 화필을 던지고 조그마한 마당에 나와서 하늘을 바라보며 긴 한숨 속에서 다음의 '흰 벽'을 희망할 뿐이다. 그러고 보니 괴롬에 어린 눈물이두 눈에 잠길 뿐이다."- 『신경향』(1950.2)에서 발췌

 

  다음은 작가 최인호가 화가 이인성의 최후를 소설적으로 각색해 쓴 <누가 천재를 죽였는가>의 한 부분이다.

[… 일찌감치 통행금지가 내려진 골목길을 술 취한 취객 하나가 걷고 있었다."누구냐. 정지." 돌연 거리를 차단하고 있던 치안대원이 지나가던 사내의 발걸음을 막아 세운다.

 "나 말요, 나. 천하의 나를 모르오? 이 대한민국에서 제일 가는 나를 모르오. 난 이인성이오. 천하의 천재 이인성이오."

 치안대원은 어이가 없었지만 사내의 기세가 너무나 등등하여 고위층의 인물인가 은근히 겁도 나서, 일단은 치밀던 화를 자제하고 집으로 보내준다. 그리고 경비소로 돌아온다.

 "누구 저기 위에 사는 이인성이라는 사람 알어? 그 사람 뭐하는 사람이야."

 "뭐하긴 뭐해. 환쟁이지."

 "환쟁이, 아니 그 자식이 환쟁이야?"

 치안대원은 뛰쳐나간다. 그러고는 씩씩거리며 종전의 사내가 들어간 집 대문을 발길로 걷어찬다.

 "누, 누구요."

 술 취해 자리에 누워 있던 이인성이 옷도 채 입기 전에 문을 열고 나서려는 순간, 치안대원의 총이 잠결에 뛰쳐나온 이인성의 이마를 향한다. 방아쇠를 잡아당긴다. 타앙. 한 발의 총성이 적막을 찢는다. 이인성은 쓰러진다.]

  한국의 고갱이요 세잔으로 불렸던 이인성은 1950년 늦가을 서른 아홉 나이로 북아현동 집에서 이렇게 어처구니 없이 최후를 마친다.

 이인성의 명성은 사후에도 이어져 한동안 대구에서는 그림에 소질있는 아이들에게 "너 커서 이인성 될래?'라는 말이 유행했을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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