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혜석(1896-1948, 수원)
1896년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나혜석은 어릴 때부터 우등을 놓치지 않는 명민한 소녀였다. 진명여학교를 졸업한 뒤 오빠의 권유로 동경여자미술학교에 입학해 이때부터 활발한 문필활동과 그림작업을 시작했고 귀국 후 미술교사로 일하면서 꾸준히 작품활동을 했다. 〈자화상〉,〈스페인풍경〉,〈파리풍경〉등의 작품이 남아 있다.
동경시절 나혜석은 이광수 등과 친교하는 한편, 여성의 권리를 부르짖는 '이상적인 부인'같은 글을 유학생 동인지에 발표해 유명해진다. 스물 다섯에 한국여성으로는 처음 유화 개인전을 가진 그는 모닝 커피를 즐기는 멋쟁이 신여성이었고 자유연애의 불을 지핀 장본인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 신여성의 자유 연애는 시대와 불화한다. 아니, 차라리, 정면충돌한다. 당대의 최고 작가 김동인은 소설 <김연실전>에서 이들 엘리트 신여성의 자유 연애 지상주의를 통렬히 비웃었고, 촉망받던 작가 김일엽은 이루지 못한 사랑을 뒤로 하고 수덕사로 들어가 스님이 되었다.
"세상의 모든 신용을 잃고 모든 공분 비난을 받으며 부모 친척의 버림을 받고 옛 좋은 친구를 잃은 나는 물론 불행하려니와 이것을 단행한 씨에게도 비탄, 절망이 불소할 것입니다."
1934년 8, 9월호. 월간 잡지 '삼천리'에는 우리 역사상 전무후무 한 '이혼 고백서'가 두 달에 걸쳐 실렸다.
화가 나혜석의 공개적 '이혼 고백서'. 당대의 명사였던 변호사 김우영과 11년 결혼 생활을 이혼으로 마친 나혜석은 이 글 내내 체념과 회한, 고통으로 가득찬 심경을 드러냈다. 당시 서른 여덟이었던 나혜석은 1929년 파리에서 최린(전 천도교 교령)과 벌였던 연애 행각이 뒤늦게 국내에 알려지면서 1931년 이혼을 당했다.
소생 4남매는 모두 남편에게 남겨두고 빈 몸으로 쫓겨난 그는 화려했던 시절을 뒤로한 채 신문 잡지에 글 쓰는 것으로 업을 삼았다. '이혼 고백서'에 이어 그는 최린을 상대로 낸 보상비 청구 소송, "당신과의 연애로 이혼을 당했으니 나를 책임지라"는 재판 청구로 또 한번 세상을 떠들석하게 만들었다.
나혜석의 결혼과 이혼, 최린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은 20세기 자유 연애 풍조가 시작될 시대의 풍경화였다.
이규태는 나혜석을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입센 '인형의 집' 노라의 가출이 유럽의 여권의식에 불을 당겼다면 한국 여권의식은 화가 나혜석의 이혼이 성냥불을 그었다 할 수 있다. 당시 모던 걸이라 하여 양장에 단발을 한 여인이 없지 않았지만 남성우위 사회에의 이혼 저항은 용기있고 파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삼강 오륜에 억눌리고 양반에 억눌리고 남성에 억눌리고 조상에 억눌리고 남편에 억눌려 온, 그래서 그저 숨만 쉬고 살아왔던 한국 여성의 인간 선언이다. 이로부터 외형적인 신여성만이 아닌 내실있는 신여성으로 목소리를 내게 된 것이다.]
다음은 김병종의 글이다.
[그녀에 대해 사람들이 기억하는 것은 우리 나라 최초의 서양화가로서의 나혜석의 이름이다. 아직 조선이 캄캄하던 1910년 대에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에 유학하고 유럽을 여행하며 필명을 날렸던 화려한 명성의 그 나혜석만을 기억한다. 구시대적 권위와 인습과 도덕률에 저항하며 실의와 고독 속에 삶의 종장을 맞았던 또 다른 나혜석에는 무심하거나 무지했다.
증조부가 호조참판증직, 부친이 용인군수를 지낸 명가에서 태어난 조선 예원의 여왕 정월 나혜석, 동경 유학에서 돌아온 그녀의 첫 개인전, '1921년 3월, 경성일보사 안의 내청각'이 몰고온 경이로운 폭발력을 '매일신보'는 이렇게 전한다.
"…(여성)서양화가로 우리 조선에 유일무이한 나혜석씨의 양화 전람회는… 인산인해를 이루도록 대성황이었으며… 제2일에는 더욱 많아, 3시까지의 관람자가 무려 4,5천명에 달하였더라…"
한 사람의 전시회에 4,5천명이 몰려들었다. 요즘에도 상상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그녀는 외교관 김우영과 결혼하여, 1927년 구라파 여행길에 오름으로써 또 한 번 세인의 뜨거운 관심을 받는다. 이때 그녀의 나이 32세, 당시의 유럽이나 미국은 조선인에겐 풍편으로나 듣던 피안이었다. 영국 유학을 하고 돌아오는 청년 장택상을 조선총독이 마중 나갔다는 시절이었다. 그런 점에서 그녀는 식민지 조선여성으로서는 선택받은 신데렐라였다. 장장 16개월에 걸친 구미 여행은 벅찬 흥분과 감동의 연속이었다.
그녀는 수많은 미술관과 박물관, 화랑을 들러 서구미술의 흐름을 숨가쁘게 체험하고 1933년부터 이듬해 걸쳐 「구미유기」라는 글로 월간지 「삼천리」에 집중적으로 연재한다. 빠리에서 그녀는 20세기 미술의 새로운 기운을 엿보았으며, 여성의 당당한 실존과 자유를 보았다. 밤늦도록 카페에서 삶과 미술을 이야기하며 그녀는 거기서 다른 세상을 보았다. 그러나 미술을 전공하고 돌아오더라도 변변한 화랑 하나없던 경성을 생각하면 우울하기만 했다. 예술가라고는 했지만 며느리로서 그리고 어머니로서의 가사와 육아문제 등에 있어서 그녀라고 별다른 면책이 없었던 것이다.
마침내 남편 김우영만 귀국하고 그녀는 1년 동안 빠리에 남아 아내도 어머니도 아닌 화가 나혜석의 삶을 영위한다. 이 기간이야말로 완전히 화가 나혜석 자신만을 위한 삶이었다고 할 수 있다. 빠리에 홀로 남은 그녀는 몇몇 연구소와 작가의 아틀리에를 드나들며 20세기 미술의 새로운 기운을 호흡하는 데, 특히 야수파 계열의 격정적이고 활달한 필치가 그 마음을 사로잡는다. 밤늦도록 카페에서 삶과 예술을 이야기하는 미술가들 속에서 그녀는 무엇보다 서구 여성의 당당한 실존과 자유를 보았다.
그러나 꿈 같은 빠리 체류동안 중추원 참의 출신에 언론사 사장을 지낸 당대의 명사 최린과의 염문으로 생애의 분수령을 가르게 된다. (린은 호남아였지만 광복 후 친일 문제로 법정에 서기도 한다). 여성의 버선목만 보아도 허벅지를 보았다고 하던 시절이었다. 그녀를 향한 어제까지의 박수가 비난으로, 선망이 저주로 바뀌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여류화가 나혜석'의 글을 쓴 이명온이라는 사람은 이 사건에 대해 '누구의 과오도 아니며 원죄다'라고 역설한다. 이방인 특히 이방 예술가를 정신없이 취하게 만들어 버리는 빠리의 분위기가 감성 여린 그녀에게는 덫이었다는 것이다. 빠리에 갈 때마다 몽마르뜨나 몽빠르나스 그리고 생 제르맹 거리의 카페에 앉아 나는 망연히 나혜석의 자취를 더듬곤 했다. 예나 이제나 예술가의 자유혼을 불타게 하는 빠리는 확실히 낭만을 넘어 사람을 취하게 하는 그 무엇이 있었다.
어쨌든 이 사건이 빌미가 되어 그녀는 원치 않는 이혼을 하게 된다. 그러나 굴하지 않고 『삼천리』지에 저 유명한 '이혼고백서'를 쓴다. 그와 함께 사회적 지탄의 화살을 온몸으로 막아내며 재기를 위한 전시를 준비하여 마침내 100여 점이 넘는 작품으로 최후의 개인전을 열었지만 평단과 대중의 반응은 싸늘한 것이었다. 이후 그녀는 급격하게 황폐해 갔고, 붓을 놓아 버린 채 수덕사, 마곡사, 해인사등지를 전전하며 정처없는 유랑의 길에 오른다. 언젠가는 수덕사 견성암으로 승려가 다 된 여류작가 김일엽을 찾아가기도 한다. 그 때 남편과 아이들은 대전(大田)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녀는 스스로 에미노릇을 못했다는 자괴감에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안고 먼 발치에서 하교하는 아이들을 바라보곤 했다. 그런 날 밤이면 송림의 바람소리마저 어머니를 부르는 아이들의 소리로 들려 화들짝 놀라 일어설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때 이미 육신은 무너져가고 죽음의 그림자는 서서히 그녀를 덮치고 있었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 해 겨울밤, 산사와 양로원을 떠돌던 반신불수의 그녀는 몰라보게 피폐해 있었다. 육신의 마비와 함께 정신분열 증세까지 겹쳐 있었다. 그 크고 아름답던 눈은 피곤에 찌들대로 찌들어 총기를 잃고 있었으며 손은 떨고 있었다. 오만하던 미의 여왕의 모습은 간곳 없었다. 그녀는 심하게 떨리는 손을 감추며 입술을 달싹여 뭐라고 중얼거렸다.
"자식들이… 자식들이 미치도록 보고 싶어."
마른 볼 위로 주르르 눈물이 흘렀다.
그 2년 후 그녀는 행려병자가 되어 용산의 한 시립병원<시립자제원> 무연고자 병동에서 홀로 숨을 거둔다. 눈부신 봄날 태어나, 춥고 시린 겨울밤 그렇게 쓰러져 간 것이다.
"사남매 아이들아, 어미를 원망하지 말고 사회제도와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라. 네 어미는 과도기에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였느니라"고 절규했던 나혜석.
자신의 예술과 사랑에 오만하도록 당당했던 그 조선 예원의 꽃은 죽음을 지켜본 사람도, 시신을 거두어 묻어준 사람도 없이 '관보'의 사망자 광고란에 그렇게 한 줄로 남았다. 그러고는 끝이었다. 나혜석의 모든 것은 신화처럼 묻혀 버렸다.
불과 50년 세월의 안팎에서 모든 것이 지워져 버렸다. 그녀의 생가터인 수원 '나참판댁'의 자취는 찾을 길이 없고 그녀가 잠들어 있는 묘지는 불명이다.
나혜석처럼 극과 극을 달렸던 삶을 살았던 여성도 흔치 않았을 것이다. 전반기의 삶이 화려했던 만큼 후반기의 삶은 비참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본다면 전반기의 삶은 그 보호막을 박차고 나와 춥고 험한 현실 속에서 스스로의 자유와 실존을 위해 몸부림침으로서 의미 있는 것이었다. 이혼고백서를 쓰고 당당히 위자료를 요구했던 일 등은 만천하에 여성의 당당한 자유와 실존을 외친 사건이었으며 아직도 남성의 예속 하에 있던 수 많은 여성들을 계몽, 자각시킨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나혜석 여사의 삶은 이처럼 여성이라는 한계와 억압을 박차고 인간선언을 하기 위한 의지로 시종한 것이었다. 대부분의 여성들이 자기 이름을 걸고 화가의 삶을 살기 어려웠던 시절에 그것도 다른 여성들이 택하려 하지 않았던 서양화를 택해 외국유학을 시도한 것부터가 파격적이었으며 더구나 화가의 몸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옥고를 치룬 일 또한 범상한 삶이 아니었다.
모든 불합리한 제도와 관행에 대해 여자의 몸으로서 당당히 <왜?>라고 질문하였으며 그 질문에 스스로의 삶을 던져 답하려 하였다. 편안하고 선택받은 삶을 박차고 끊임없이 문제와 부딪혔으며 편견과 싸웠다.
시와 소설 평론을 쓴 문필가이자 사상가로서, 그리고 여권운동가로서 치열하고 폭넓은 삶을 살았다.
한 연약한 여성으로서 완강한 봉건적 사고와 제도의 벽에 끊임없이 부딪쳐 결국 피투성이로 소멸되어 갔지만 그녀가 이룬 근대적 자각들은 굵고 큰 획을 그은 것이었다.
1921년 4월 <매일신보>에 실린 그녀는 자기 고백적인 시 한 편을 그녀의 삶목표와 방향을 가장 극명하게 압축한 것이었다.
내가 인형을 가지고 놀 때
기뻐하듯
아버지의 딸인 인형으로
남편의 아내 인형으로
그들을 기쁘게 하는
위안을 되도다
남편과 자식들에게 대한
의무같이 내게는 신성한 의무 있네
나를 사람으로 만드는
사명의 길로 밟아서
사람이 되고저
나는 안다
억제할 수 없는 내 마음에서
온통을 다 헐어 맛보이는
진정 사람을 제하고는
내 몸이 값없는 것을
나 이제 깨도다
아아! 사랑하는 소녀들아
나를 보아
정성으로 몸을 비쳐다오.
많은 암흑 횡행할지나
다른 날, 폭풍우 뒤에
사람은 너와 나
(후렴)
노라를 놓아라
최후로 순수하게
엄밀히 막아논
장벽에서
견고히 닫혔던
문을 열고
노라를 놓아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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