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1916-1956, 평남 평원)
이중섭은 1916년 평안남도 평원군 송천리에서 부농 이희주와 안악 이씨 아들로 태어났다. 형은 12년 위, 누나는 6년 위의 귀한 막내였으나 1923년 5세 무렵 부친이 작고했다. 1925년 마을 서당에 다니다가 평양의 외가로 가서 종로 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어려서부터 이중섭은 그림에 뛰어난 소질을 보였고, 그림 그리기에 몰두하여 사과를 먹기 전에 먼저 그림을 그리고 먹었다고 한다.
1931년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고등보통학교에 입학. 미술부에 가입해 당시 교사이던 유화가 임용련, 백남순 부부의 집중적인 지도를 받았다. 이때부터 소를 즐겨 그렸다고 한다.
1935년 졸업 후 곧 일본 동경으로 가서 테이코쿠 미술학교에 입학. 1938년 경 미술학교 후배인 일본 여성 마사코를 알게 되어 사귀기 시작했다. 졸업 후 휴가로 원산에 있으면서 연말부터 마사코에게 그림만으로 된 엽서를 보내기 시작했다.
시인 오장환, 서정주와 교유하기 시작. 시인 서정주의 증언에 의하면 마사코가 경성으로 와 놀다가 갔다고 한다. 1945년 4월 마사코가 천신만고 끝에 홀로 현해탄을 건너 원산으로 와서 결혼하였다. 아내의 이름을 이남덕으로 바꾸고 분가하여 따로 집을 마련해 살다가 소련의 대일 폭격을 피해 다시 이사했는데, 여기서 8. 15를 맞이하였다.
1946년, 31세때 원산사범학교의 미술교사가 되었으나 작업 에 전념하기 위해 사직했다. 첫 아들이 태어났으나 곧 죽음. 연말에 원산문학가동맹에서 펴낸 공동 시집 응향(凝香)의 표지를 그렸는데 詩 내용과 더불어 표지 그림에 대해 북조선문학가동맹의 규탄을 받아 문초를 받았다.
이후 부인이 일본인이라고 하여 친일파로 분류된 점과 자유롭게 그림을 그릴 수 없다고 하면서 자주 술 마시고 주정을 부리기도 했다고 한다. 큰 아들 태현이 태어나고, 1949년 34세 때는 차남 태성이도 태어났다.
원산 시외인 송도원으로 이사. 소를 하루 내내 관찰하다가 소도둑으로 오인한 소 주인에게 고발당하기도 했다.
원산에서 가까운 강원도 금성에 살던 화가 박수근과 친하게 됨. 1950년 35세,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에 가장인 형이 행방불명되고 10월에는 집이 폭격으로 없어졌다. 12월 초 바뀐 정세에 따라 부인, 두아들, 조카 영진을 데리고 부산으로 피난을 왔다.
범일동의 창고에 거처를 정하고, 부두에서 짐 부리는 일에 잠시 종사함.
1951년 36세 초에 가족과 부산을 떠나 제주도로 왔다. 여러 날 걸어서 서귀포에 도착. 서귀포에서 만난 주민이 방을 내주어서 안착하게 된다. 피난민에게 주는 배급과 고구마로 연명하는 한편, 게를 잡아 반찬으로 했다.
선주에게 사례하기 위해 6폭의 병풍 형식의 그림을 그려 주었다. 12월 다시 부산으로 와서 오산학교 동창을 만나 범일동에 있는 판잣집을 얻게 되고 일본의 처가로부터 소액의 원조금이 왔다.
1952년 37세 국방부 종군화가단에 가입. 그러나 가난이 계속되어 부인과 두 아들은 일본인 수용소에 들어갔다가 곧 일본의 친정으로 가고 이별하게 되었다. 부인과 두 아들에게 보내는 그림편지가 시작되었다.
이중섭은 노래를 잘 불렀다. 테너 목소리로 쩌렁쩌렁 불렀다는 것이 친구 김병기의 기억이다. 그가 잘 부르던 노래는 둘인데, 독일민요 ‘소나무’와 이광수 작시 ‘낙화암’이었다.
1953년 38세, 부인이 남편 이중섭의 생활과 제작비를 위해서 오산 후배인 해운공사 소속의 승무원에게 일본서적을 외상으로 보내고 이익의 일부를 이중섭에게 주기로 했으나 후배가 착복함으로써 처가는 거액의 빚만 지게 되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이중섭은 실망과 괴로움을 안고 8월 시인 구상이 국회의원에게 부탁하여 어렵게 선원증을 입수해 일본으로 갔으나 장모의 냉대와 처자식의 어려움을 보고, 일주일만에 귀국해버렸다.
이중섭이 가족과 생이별을 한 채 쓸쓸하게 생을 마감하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원인들이 있었을 것이다. 이중섭의 지나칠 만큼 둔감한 경제적 불감증, 고향후배에게 사기를 당하여 처가가 많은 빚을 지게 되었고 일본에서 이중섭의 능력으로는 그 빚을 감당하기가 불가능했던 점, 당시의 미묘한 한일관계로 인한 출입국의 어려움 등이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1954년 서울로 가서 부인이 진 빚을 갚기 위해 개인전을 열 계획이었다.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연말에 입원, 치료도 했다. 이 무렵 자신을 베껴먹으려는 일단의 사람들에 대하여 다방의 탁자를 집어던지면서 대갈일성한 일이 있었고, 간염이 극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1955년 40세 1월 18일부터 서울 미도파 갤러리에서 개인전 개최, 유화와 은박지그림을 비롯한 소묘 등으로 전시는 호평이었으나, 은지그림이 춘화라고하여 철거당하고, 그림 값을 떼이기도 했다, 저녁마다 술로 지내다 빈털털이가 되어 자학과 외로움으로 기진맥진에 빠졌다.
1955년 초 서울에 이어 5월 대구에서도 개인전을 열어 어려운 상황을 타개해 보려던 의도는 산산이 부서진다.
밀항을 해서라도 가족이 있는 일본으로 가겠다는 계획도 실패로 돌아가자 자포자기에 빠져 그토록 열심이던 그림도 그리지 않고 밥도 먹지 않겠다고 하자, 정신 이상이라는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대구서 개인전을 열고자 작품을 준비하던 이중섭이 친구인 구상의 호의로
그 집에 머물면서 구상이 그의 아이들에게 자전거를 사주어서 모두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고는 부러워하기도 했다. 자신은 가족과 헤어져 있었으며, 자신의 아들에게 자전거를 구해서 가겠다는 약속을 편지에서 여러 번 한 바가 있었기 때문에 부럽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구상의 권유로 남은 그림을 가지고 대구로 가서 여관방을 전전하면서 제작, 5월에 미국공보원 전시장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영양부족과 극도의 쇠약으로 정신분열 증세를 보이기도 했다. 성가병원에 1달여 입원. 친지들이 퇴원시켜 서울로 데려가 이종사촌의 집에 머물다가 수도육군병원에 재입원하였다. 성베드로 병원으로 옮김. 곧 나아졌다고 여겨져 퇴원하여 화가 한묵과 정릉에서 하숙을 하였는데, 황달이 극심했다고 한다.
1956년 41세, 영양실조와 간염으로 고통을 겪으면서 다시 음식을 거절하기 시작. 청량리뇌병원에 입원. 정신이상이 아니라는 진단을 받고 퇴원했으나 곧 다시 서대문 적십자병원에 입원했다.
미국 뉴욕 모던 아트 뮤지엄에 은지화 3점이 소장되기로 결정되었으나, 9월 6일 홀로 숨을 거두었다. 3일 뒤 친지들이 이를 알고 장례를 치루고 망우리 공동묘지에 그를 묻었다.
다음은 고은의 소설에서 발췌한 것이다.
[ 친구들이 그림 값을 받으면 모여든다. 그러나 그의 비판자는 그에게 돈을 쓰지 말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되풀이 권한다. 그러나 중섭은 <저 사람들이 보고 있는데 어떻게 이걸 가지고 간단 말야>라고 말하고 상투적으로 대여섯 번 다방을 들락날락하면 빈 호주머니가 된다.
영도에서 유일한 개털오버를 술집에 잡히고 술을 마시고 대한도기에 있는, 황염수, 김서봉의 방에 와서 오들오들 떠는 일이 있었다. 황은 <찾아오라>고 몇 푼 모아둔 것을 주면,
"그래. 그래. 꼭 찾아오겠다."
" 꼭 찾아와야 한다."
그러나 한참 있다가 술어 거나해져서 돌아오고 오버는 둔 채였다.
중섭에게는 그림 자체가 문학과 매우 가깝다는 사실과 함께 문학쪽의 친지가 언제나 있어야 했다. 통영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유치환, 김상욱, 이영도가 있다. 화가들과 시인들은 한데 어울려 술을 밤새 마셨다. 결국은 술주정을 하다가 쓰러진 사람, 어디론가 뺑소니를 친 사람 사이에서 대좌하고 있는 것은 유치환과 중섭이었다. 김상욱도 그의 양철 지붕 두들기는 것 같은, 침과 거품이 함부로 튀어나오는 사나운 예술론을 외쳐대고는 사라졌다. 박생광은 벌써 쓰러져서 낙천적이고 조용한 잠에 빠졌다. 독신 유강렬도 그의 학원으로 돌아갔다. 결국 남은 친구들은 떠들고 소리치다가 쓰러져 있었다. 유와 중섭만이 먼동 틀 때까지 대작했다.
" 이 선생, 먼통이 트니 한잠 잘까요."
"그러죠. 눈을 붙입세."
두 사람은 자기자신을 과장해서 말하지 않는다. 유의 시는 묘사의 과장과 장식이 너무 많고 중섭의 황소 역시 쇠불알이 과장된다. 그러나 그들만이 남겨진 술자리에서는 담담한 표현 부족의 희열만이 있었다.
잠자리에서 유치환은 교장답지 않게 음탕하게 웃어제치면서, <이 형은 쇠불알이 그리고 싶어 소를 그리지요?> 라고 비밀을 토로하듯이 묻는다. 중섭도 그런 대답으로는 안성맞춤이다. <그럼요. 쇠불알 덕분에 소가 좋지요. 고 말랑말랑하고 맹당한 주머니에는…만물…삼라만상이 다 들어 있외다. 헤에>
중섭은 이렇게 지내면서도 전람회가 끝난 뒤 그림 값을 거둬가지고 통영에서 실컷 마신 다음 대구로 떠난다. 그 돈을 대구에 가서도 뿌릴 작정이다. 중섭에게 돈을 쓰지 말라고 충고하면 <바보, 너 같은 속물!>이 라고 격렬하게 말하는 일도 있다.
음울한 명동에 중섭이 왔다는 뉴스는 이상한 자극이 되었다. 동료화가들은 그런 소식을 듣자 골목에서 드럼통 노천점 집에서 마치 잠복한 형사들처럼 중섭이 나타나는 것을 대기하고 있었다. 그날 밤 술을 마시고 중섭 일행은 위상학의 집으로 갔다. 가회동의 큰 집이었다. 상학은 운천에서 미군 부대의 전속 초상화를 맡아서 그렸기 때문에 부자가 되었다. 그래서 집을 산 것이다. 그러나 그 사실은 남에게 알려지기를 꺼릴 만큼 수치가 되고 있었다. 예술에 대한 죄의식이 있었다. 집은 넓은 정원이 있고 정원수가 가득하고 2층의고급주택이었다.
"야! 집 크다"
"뭘"
"이런 집 팔아서 그림이나 실컷 그릴 일이지. 왜 이런 집을 차지하고 있지?"
중섭의 첫마디에 상학은 고통스런 충격을 받았다. 최영림, 장이석, 황율엽도 차근호도 중섭을 다시 바라보았다. 그 말에 기가 질린 상학의 침묵 때문에 중섭은 당황했다.
"술 좀 줍세"
상학은 양주를 꺼내오려다가 소주를 사오라고 했다. 찌개를 끓이고 안주를 푸짐하게 장만했다. 그들은 술을 마시고 거의 곯아떨어졌다. 이런 일이 있었던 훨씬 뒤에 위상학은 그의 예술적 갈등 때문에 자살해 버리고 말았다.
1955년 2월 이중섭전 직전에 정신 분열증의 발작현상이 보였다. 그래서 태응이 중섭을 개인전 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 있으라고 했다. 왜냐하면 <내 그림은 가짜야!>, <내 소는 스페인 투우야>, <남덕아, 네가 밉다>라고 외치는 것을 태응이 목격했기 때문에 전람회장에 나타나면 틀림없이 걸린 그림들을 부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제 1차 후퇴 당시의 전시에 대구에 온 서정주가 피해 망상의 정신착란증을 앓은 것과 비슷한 증세였다. 서정주는 김일성이 죽이려 하기고 하고 그의 친구들이 모함해서 죽이려 한다는 강박 관념으로 조지훈도 그를 보살피는 구상도 의심했던 것이다. 대구는 6.25전란 중 위대한 두 예술가가 깊은 병에 잠겼던 곳으로 기념된다.
대구의 개인전 역시 술뿐이었다. 그림 값이 들어오면 우우 몰려와서 탕진해 버리고 만다.
1956년 9월 6일 오전 11시 45분 간장염으로 입원가료중 사망, 이중섭 40세.
적십자 병원 사체 안치실의 흑판에 씌여 있던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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