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벨라 버드 비숍(Isabella Bird Bishop 1831-1904)
이사벨라 루시 버드는 1831년 영국의 북부 요크셔지방에서 목회자인 에드워드 버드의 딸로 태어났다.
친가와 외가 모두가 중류 이상의 유복한 가문이었으며 여동생 헨리에타는 유일한 형제였다. 태어난 이후 줄곧 허약한 채로 성장했던 그녀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등의 통증 때문에 늘 괴로워했으며, 18세 때에는 등에서 종양을 떼어내는 수술을 받기도 했다. 몸이 약한 그녀를 위해 가족들은 여자아이였음에도 격렬한 옥외활동을 할 수 있게 배려했다. 가족의 이러한 태도는 그녀가 사회적 규범에 얽매이지 않고 평생 동안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해 주게 된다.
성장기의 모든 시간을 자신을 괴롭히는 통증과 싸우면서 보낸 그녀는, 1844년 23세 나이에 의사의 권고로 혼자 여행길에 오르게 된다. 이사벨라를 딸이라기보다는 아들처럼 여겼던 아버지 덕에 19세기 말의 여성으로서 20세기에나 가능했을 기회를 얻은 것이었다. 뱃길을 이용하여 리버풀에서 출발하여 핼리팩스를 거쳐 뉴욕까지 갔다가 오는 여행이었다.
여성들은 시중드는 사람 없이는 한 발자국도 여행할 수 없다고 여겨지던 그 시대에 미혼의 젊은 숙녀가 홀로 여행길에 오른다는 것은 하나의 사회적 사건이 될 만 했다. 의사의 예측대로 항해를 하는 동안 육체적 괴로움은 사라졌고, 새로운 사람들과의 많은 교우 그리고 인상적인 풍경들을 통해 얻은 기쁨이 그녀를 훨씬 건강하게 만들었다. 미국에서는 철도를 이용하여 보스톤과 온타리오 호수, 신시내티 그리고 동해안을 여행한다.
여행에서 돌아와 그녀는 1856년 《미국에 간 영국 여인(The Englishwoman in America)》을 출간했다. 그녀의 첫 번째 여행기였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오자 병은 다시 도졌고 그녀는 더 이상 자신이 옛날처럼 살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또다시 미국 여행을 통해 병으로부터 도망치려고 했으나 1858년 자기 인생의 추진력이자 표준점이라고 여겼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그로부터 8년 뒤엔 어머니마저 세상을 뜨게 된다. 첫 번째 여행 이후 발이 묶인 그녀는 시간이 도망치듯 흐르고 있다고 느끼는 가운데 자신의 육체적 쇠락과 고통으로 불안해했다. 그 불안을 미지의 세계로 탈출함으로써 극복하고 싶어 했지만 그녀에게 헌신적인 동생 헨리에타를 남겨두고 떠나기가 쉽지 않았다.
1871년, 그녀는 마흔 살이 되어 있었고 그녀의 삶에서 더 이상은 어떠한 도전도 탈출도 가능하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있을 때, 다시 여행의 기회가 찾아왔다. 건강을 위해서 여행을 하라는 의사의 권고가 또다시 그녀에게 ‘자유’를 향해 떠나는 배표를 선사한 것이었다. 그녀는 그녀의 삶이 다하는 날까지 기꺼이 이 같은 의학적 권고를 받아들였고, 몸이 움직일 수 있는 한 그녀의 여행은 계속되었다. 이후 끊임없이 계속된 미지에 대한 탐험은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강한 의지와 지성을 겸비했던 19세기 여성 여행가’로서 명망을 얻게 한다.
1872년 10월, 이사벨라는 호주 멜버른의 찰머스 맨스(Chalmers Manse)에서 41세의 생일을 맞이한다. 호주의 더위와 먼지에 진절머리를 느낀 이사벨라는 뉴질랜드 또한 더 나을 것이 없음을 느꼈다. 하지만 오래된 증기선인 네바다호를 타고 오클랜드에서 하와이로 가는 1873년의 여행에서 그녀는 허리케인을 바다 위에서 만나게 되고 오히려 생기를 되찾는다. 그녀의 흥분은 지금의 하와이 섬인 샌드위치제도에 도착하자 최고에 이르렀다. 새로 도착한 곳에 매료된 그녀는 6개월 동안 그 섬에 머물렀다. 거기서 터키식 바지를 입고 남성용 안장을 얹은 말을 타면서 4천 미터 높이의 화산 마우나 로아를 등정하기도 했다.
하와이를 떠난 그녀가 새롭게 향한 곳은 로키산맥이었다. 샌프란시스코에 내린 이사벨라는 콜로라도를 여행했고 운명의 남자였던 짐 뉴젠트를 만났다. 로키에서의 생활은 미개 야만의 상태와 다름이 없었지만 이사벨라는 특유의 강인함으로 극복해내면서, 짐의 도움으로 에스티스 파크(Estes Park)의 가장자리에 있는 1만 4천 피트가 넘는 험준한 봉우리 롱스 피크(Long"s Peak)를 무사히 등정한다.
하와이와 로키에서 그녀가 경험한 놀라운 세상은 두 권의 책이 되어 세상에 펼쳐졌다. 1875년에 출간한 《하와이 군도(The Hawaiian Archipelago)》와 1876년에 출간한 《로키산맥의 숙녀(A Lady"s Life in the Rocky Mountains)》로, 두 책은 모두 그녀에게 큰 성공을 안겨주었다.
그녀가 다음 모험지로 정한 곳은 일본이었다. 일본은 1859년에 개항을 했고 도쿄와 그 외 몇몇의 큰 도시는 이미 변화의 물결을 타고 있었다. 이사벨라가 원한 곳은 변화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옛 일본의 정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그런 곳이었다.
1878년 5월 일본에 당도한 그녀는 외국인을 적대시하는 사무라이의 공격에 대한 위험을 감수한 채, 도쿄 주재 영국 공사의 도움과 염려 속에 여행길에 나선다. 여행을 위해 고용한 일본인 이토와 함께 도쿄 북쪽의 혼슈 지역과 니가타, 아오모리지역을 돌아다니면서, 하코다테의 아이누족 마을을 여행한다. 일본 여행을 마치고 2년 후 일본여행에 대한 결과물로 《일본의 미개척지를 찾아서(Unbeaten Tracks in Japan)》를 출간한다.
영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사벨라는 말레이시아에 들러 두 달간 그곳에서 다시 여행을 하게 된다. 여행의 결과물로 역시 또 한권의 책이 출간되었다. 1883년에 나온 《황금반도와 그 곳으로 가는 길(The Golden Chersonese and the Way thither)》이었다.
일본과 말레이시아 여행에서 돌아온 이사벨라 루시 버드는 1879년 동생 헨리에타의 죽음을 맞아야 했고, 동생의 사후 헌신적인 자신의 주치의 존 비숍과 결혼하게 된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여사가 된 것이다. 결혼은 그녀를 영국에 묶어두는 끈이 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끈 또한 오래지 않아 다시 풀리고 만다. 자신보다 열 살이나 적은 나이였던 남편 존 비숍이 1886년 44세의 나이로 죽었던 것이다. 결혼 5년만의 일이었다.
사랑하는 가족이 모두 떠난 영국에서 그녀의 여행을 막는 것은 이제 아무 것도 없었다. 여행을 다시 시작하기로 맘먹은 그녀는 보다 먼 여행을 계획했고 목적지를 인도로 정했다. 인도에서는 멀리 떠나려 했던 애초의 계획과는 달리 동생과 남편의 이름을 딴 기념병원을 세우는 일에 매달리면서 보냈다. 그녀는 인도가 지나치게 영국적이라고 생각했고 따라서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오히려 서 티베트를 가로질러 당도한 중앙아시아의 풍경이 그녀를 사로잡는다.
1890년의 페르시아 여행에는 동반자가 있었다. 중동지역의 석유와 다른 광물들에 대한 선취권을 놓고 러시아와 대립하고 있던 영국은 조사를 위해 그곳에 탐험대를 파견했는데 그들 중의 한 사람인 허버트 소이어 소령이 그녀와 동행하게 된 것이다. 여행의 시작은 그와 함께 했지만 결국은 결별하고 그녀 혼자 페르시아 여행을 완성한다. 여행의 범위는 쿠르디스탄과 터키까지 이르게 된다. 이때의 여행기는 《페르시아와 쿠르디스탄의 여행(Journeys in Persia and Kurdistan)》이라는 제목으로 1891년에 출간된다.
1892년에는 런던의 왕립지리학회에서 그녀를 회원으로 받아들였다. 물론 그녀가 원한 것도 아니었고 심지어 커즌(G. N. Curzon)과 같이 ‘치마를 입고 여행하는 여자’라고 그녀를 경멸하는 시선으로 본 사람들이 없지 않았지만 그녀는 공식적으로 회원 인정을 받게 된다. 최초의 여성회원이었다. 왕립학회의 회원이 된다는 것은 당시 사회에서 개인적으로 큰 영예였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이러한 영예에 대해 ‘여성의 일을 인정하게 된 개혁에 감사한다’는 간결한 대답으로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1894년 60대 중반의 나이를 맞이한 이사벨라는 사진 찍는 것을 새로 배우는 한편 극동의 나라 한국과 중국을 여행할 계획을 세운다. 젊은 시절의 여행이 남들이 경험하지 못한 미지의 세계에서 오는 흥분이 가득한 것이었다고 한다면 노년기 여행은 여행지에 대한 인류학적이고 지리학적인 관찰과 조사가 주를 이루었다. 개인의 감상이 돋보였던 이전의 여행들과는 달리 학문적 가치를 지닌 자료를 남긴 여행이었던 것이다.
그녀가 처음 조선에 입국한 것은 1894년 겨울이었다. 러시아 여행 이후 일본을 거쳐 조선에 온 그녀는 한강을 거슬러 오르는 여정을 통해 조선의 중부 내륙을 보았고 육로로 금강산과 그 이북 지역을 여행했다.
이후 1897년까지 네 번의 방문을 통해 모두 9개월 간 조선에서 머물렀다. 그녀는 조선을 러시아, 중국, 일본의 가운데 놓여 있는 ‘셔틀콕과 같은’ 신세로 보았다. 그러나 ‘은자의 나라’에 살고 있는 조선 사람들을 ‘길이 번영할 민족’이라고 기록하기도 했다. 1894년에 일어난 청일전쟁 때문에 돈과 짐을 모두 잃고 쫓겨나다시피 조선을 떠나는 경험도 한다.
1894년부터 1897년까지 극동아시아에 머무는 동안 비숍여사는 중국의 북부와 중앙 지역을 여행한다. 양쯔 강에서의 엄청난 홍수와 서양인에 대한 중국인들의 공격으로 위험에 처하면서도 의료선교활동을 겸한 중국여행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그 결과 1898년 《조선과 그 이웃들(Korea and her Neighbours)》를 펴냈고, 1899년에는 《양쯔 강 계곡과 그 너머(The Yangtze Valley and Beyond)》를 출간했다.
책이 출간된 후 쉴 틈도 없이 그녀는 다시 모로코 여행길에 올랐다. 1901년, 나이는 70세를 맞고 있었다. 모로코는 그녀에게 마지막 해외여행지가 되었다. 모험으로 가득 찼던 여정의 종착지였던 것이다. 그리고 1904년 에딘버러에서 73세로 인생의 여정 또한 마감한다.
성난 사무라이의 위협, 무슬림처럼 두건을 쓰고 다녀야 했던 페르시아 여정, 영국여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가해지는 무차별적 공격을 경험하게 한 중국에서의 여정. 그 어느 곳에서도 신체적 위협이나 마음의 두려움 때문에 뒤로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젊지 않은 나이, 160 센티미터의 키에 작은 체구, 늘 통증에 시달리는 병약한 환자, 그리고 여성. 이 같은 조건 가운데 그녀의 의지를 막는 것은 없었다. 오히려 이런 조건들은 스스로를 강하게 했고, 자기 인생의 문제점들을 해결하는 출발점이 되었다. 그녀는 ‘자기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여성의 권리’ 라고 생각했고 스스로 그렇게 했던 결과 자신을 영국 빅토리아 시대 가장 유명한 사람 가운데 한사람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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