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거 앨런 포(1809-1849, 미국 보스턴)
1809년 1월, 보스턴의 가난한 유랑극단 배우였던 양친 사이에서 태어난 포는 세 살 때에 어머니를 여의고, 얼마 안가 아버지도 세상을 떠나버림으로써 불우한 고아의 인생이 시작되었다. 포는 리치먼드의 담배 수출상의 양자가 되었으며, 1815년에는 양부를 따라 영국으로 건너가 살게 되었다. 그는 런던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다가 미국으로 돌아온 후 열 일곱 살 때에 버지니아대학에 입학했다.
그러나 도박에 손을 대서 빚을 지는 등 무절제한 생활로 말미암아 양부와의 사이가 원활하지 못해지자 집을 뛰쳐나왔다. 그는 가명을 사용하여 육군에 입대하여 특무상사까지 진급했고 제대한 다음 1830년에는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에 입교하기도 했으나 그의 성격을 조화시키지 못하여 퇴교하고 말았다.
양모인 앨런 부인은 포를 친자식 못지 않게 위해 주었으나, 양모는 그가 스무 살 나던 1829년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재혼한 양부에게서 재산 상속의 희망이 없어지자, 포는 양부와의 인연을 끊어 버린 채 문필생활에 전념하게 되었다.
이후 포는 숙모 마라이아 클렘 부인을 의지하게 되었다. 볼티모어에 살고 있던 클렘 부인은 과부로서 슬하에 딸 버지니아 클렘을 두고 있었는데, 포는 이 숙모집에 살면서 버지니아를 사랑하게 되어 결혼까지 하였다. 그때 포는 스물 일곱 살이었고 버지니아는 열 네 살이었다. 포와 숙모일가는 가난하면서도 서로 의지하여 살아갔으며, 그나마 불우했던 포의 온 생애를 통하여 이 숙모 일가가 포에게는 더없이 아늑한 안식처였던 것이다.
문인으로서의 포는 시, 단편소설, 서평, 수필 등을 쓰는 한편 잡지 편집자로 활동했으며, 만년에는 작가로서의 명성을 얻기도 했으나, 숙명적인 가난을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그가 시에서 소설로 방향을 돌린 이유도 생활비 마련을 위해서였다고 한다.
포가 시인으로서 명성을 얻은 것은 1845년 초의 <갈가마귀>였는데, 그는 시집 <갈가마귀 기타의 시(The Raven and Other Poems>의 머리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내겐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 중첩되어서, 나에게 여건만 주어진다면 당연히 내가 즐겨 택해야 할 분야(시작생활을 의미)에 온갖 정력을 쏟을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 시는 목적이 아니고 불타는 정열이었던 것이다.]
포는 또 그의 단편소설에 대하여 <괴기소설집>의 머리말에서 다음과 같이 자기의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한두 사람의 비평가는 내 착실한 단편소설을 두고 너무 아라베스크하기 때문에 독일적이라고 평하고 있으나, 그러한 비난이야말로 악취미인 동시에 근거가 없는 말이다. 만일 내 작품의 경우에, 공포가 그 주제라고 한다면 그 공포는 독일적인 것이 아니고 심리적인 것이다. 나는 모든 것을, 합리적인 원인에서 공포를 이끌어내며 합리적인 결과로 이끌어 나갔다.]
포는 '검은 고양이'나 '어셔가의 몰락'등으로 대표되는 괴기담의 작가이기도 하지만, '모르그가의 살인'이나 '도둑맞은 편지'등을 쓴 추리소설의 개척자이기도 하다. 그가 '모르그가의 살인'에서 창조한 탐정 뒤팽은 코난 도일의 셜록 홈스나 애거서 크리스티의 에르퀼 푸아로 등 그 뒤의 추리 소설가들이 탄생시킨 탐정들의 모델이기도 했다.
평생 파리를 동경했지만 결국 그 도시에 가 보지 못한 포는 '시체 공시장 '이라는 의미를 지닌 '모르그'라는 이름의 파리 거리를 무대로 <모르그가의 살인>을 씀으로써 자신의 바람을 간접적으로 충족시켰다.
포의 건강을 해치고 처세에 결정적인 저해를 가져온 것은 그의 음주벽이었다. 평소에는 어느 귀족 못지 않게 점잖은 포가, 술만 한잔 들어가고 나면 술주정이 심한 데다가 아무나 잡고 시비를 걸기가 일쑤였다. 그는 몇 번이고 장모며 아내에게 술을 끊겠다는 맹세를 하기도 했으나, 끝내 술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고 말았던 것이다.
음주벽과 더불어 그의 생애를 비극으로 이끈 것은 아마도 가난이었을 것이다. 아니 이 가난이 주는 고통에서 도피하는 방법으로 음주벽이 상호작용을 했는지도 모른다. 만년에 시인으로서 성공은 하였지만 가난은 끝내 벗어나지 못하였다. 1846년에 그는 뉴욕 교외에 있는 오막살이로 이사를 했는데, 어느 친지가 그의 집을 방문해 보니까, 폐병을 앓고 있는 포의 아내는 포의 외투를 입고 짚으로 된 요를 깔고서 가슴 위에 고양이를 얹어놓고 누워 있었다고 한다. (포의 아내 버지니아는 27살의 나이로 병사한다.) 외투와 고양이가 보온의 구실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포의 가난은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여실히 말해주고 있다. 작가의 저작권이 이루어지지 않았을뿐더러 문학은 으레 영국에 의존하던 시대였다. 영국뿐만이 아니라 온 유럽의 작품을 인세 없이 출판하던 시대였으므로 국내 작가의 작품을 인세를 물어가며 출판할 업자는 없었던 것이다. 또한 동시대의 작가 호오돈처럼 유력한 지원자도 그에게는 없었다.
1849년 10월 3일, 볼티모어의 의사 스노드그라스에게 급한 전갈이 날아들었다. 그 의사를 잘 알고 있다는 애드거 앨런 포라는 사람이 혼수상태에 빠져 술집에 쓰러져 있다는 것이다. 급히 달려간 의사 스노드그라스는 그날 오후 다섯 시 의식불명이 된 포를 자기 병원으로 옮겼다. 그러나 포는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10월 7일 오전 다섯 시 마흔 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불행으로 점철된 포의 비극적인 생애는, 그 최후 또한 비극적인 죽음으로써 그 막을 내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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