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의 저 천근의 그림자/ 송문헌
- 바람의 칸타타․63
지나간 시간과 걸어온 거리
길목마다 흩날리는 젖은 흔적 흔적들마다
떨고 있는 어둠의 저 천근의 그림자
눈을 감아야 비로소 선명히 떠오르는
너의 모습은 이렇듯 잠 못 이루는 밤이어야
조각달빛으로 찾아 올 수 있겠느냐
가을에서 다시 그 겨울 봄을 지나 세상은 온통
푸르고 저마다 야단법석들인데 여직 기별도
흔들림도 없는 너는 어느 바람 속에 머무느냐
찾아 나설 수도 만나 잡을 수도 없는 너는
한 걸음에 달려와 어느 캄캄한 귓가에 비로소
바람결, 귓속말로 내게 머물겠느냐
- 『바람의 칸타타』, 예맥, 2008.
- 어떤 존재나 대상, 혹은 가치에 대한 ‘상실감’이 시를 쓰게 하는 동력이란 이야기를 듣곤 한다. 생의 발랄한 면이나 기쁨보다는 어둡고 슬픈 내용의 시가 더 많이 씌어진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위 시에서 화자에게 상실감을 주는 대상은 ‘너’다. ‘너’는 구체적이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모호하지도 않다. 가까이는 화자 개인의 연인이나 벗일 테고, 좀 멀다 하더라도 화자가 지켜보거나 따랐던 사람일 게다.
‘너’는 “눈을 감아야” 더 선명해지고, 잠에서 깨어 “조각달빛”을 볼 때 연상되는 존재이다. 한 계절이 바뀌는 동안 ‘너’는 어떤 기별도 주지 않고, 화자와 ‘너’가 현실적으로 만날 수 있는 기회는 차단되어 있다.
다시 말하자면 이 시는 ‘너’의 부재로 말미암아 한때의 관계와 인연이 다하는 것에 대한 비가이다. ‘천근’이 상실감의 크기라면, ‘그림자’는 현존으로 ‘너’와 대면할 수 없다는 사무친 정한의 표현이다. 머물지 못할 것을 번히 알면서도 소망하는 데서 쉽게 잘라낼 수 없는 인연의 뿌리를 절감하게 된다.
시에서 종종 남의 상실감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서 형상화하기도 한다. 이때도 타인의 고통에 대한 시인의 정서적인 이끌림 없이는 독자에게 감동을 주긴 어려울 것이다. 정작 시에서 중요한 건 상실감의 유무나 겉으로 보이는 크기가 아니라, 얼마큼 내가 안았느냐, 얼마큼 절실하냐의 문제임을 알겠다.(이동훈)
'감상글(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면인심 獸面人心․1/ 윤준경 (0) | 2011.03.08 |
---|---|
나무, 바위틈에서 죽다/ 차창룡 (0) | 2011.02.27 |
가족/ 윤제림 (0) | 2011.02.13 |
우두커니/ 박형권 (0) | 2011.02.08 |
사는 일/ 허연 (0) | 2011.01.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