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면인심 獸面人心․1/ 윤준경
서울대공원에 있는 코끼리거북이는 102살, 에콰도르에서 수놈 두 마리가 함께 와 한 놈이 죽자, 남은 한 놈이 슬픔에 잠겼다. 모래 속에 머리를 처박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우울증에 걸렸다. 식음을 전폐했다.
고심 끝에 사육사는 2살짜리 붉은 코아티너구리를 거북이 울에 넣어 주었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코아티너구리들은 겁도 없이 거북이 주변을 뛰어 돌아다니며, 심지어 등에 올라가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온갖 난리 블루스를 떨었는데,
그런데 웬일인가 놀랍게도 거북이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밥을 먹고 헤엄을 치고 너구리들과 친구가 된 것이다.
다시 살기로 작정한 것이다.
- 『새의 습성』, 시와시학
- 수면인심獸面人心은 짐승 얼굴에 사람 마음이다. 짐승과 사람을 구별하는 속내에는 사람은 타고난 마음이나 어떤 걸 헤아리고 판단하는 생각의 정도가 짐승과 확연하게 다르다는 인식이 깔려 있을 법하다. 따라서 사람에게 짐승은 끼니를 잇기 위한 가축용이나 기꺼해야 자연의 일부로 보호하고 대우하는 수준이지 사람과 동등한 객체로 여기지 않았다. 병에 걸린 짐승을 태우고 묻고 할 수 있었던 것도 기본적으로는 이런 인식이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는지 용서 받기 어려운 살상이었는지 답해 줄 사람은 없지만 마음이 무거운 것 또한 인심人心이다. 그러니 수심獸心을 헤아리는 것도 인심이긴 한데, 인심과 무관하게 수심도 당연히 있지 않겠나.
인용한 시는 거북이 삽화를 통해 거북이의 마음(수심)이 사람과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죽음에 대어 가는 자포자기의 상태에서 새로운 동반자가 나타남으로써 삶의 의욕을 새로 다지게 되는 이야기는 사람 사이의 흔하고도 귀한 주제이다. 문제는 이게 사람의 일이 아니라 짐승의 일이란 데 있다. 돈이나 더 나은 환경에 유혹 당해 가까이 있는 사람을 버리고 사랑을 믿지 못하게 만드는 게 오히려 사람들의 일이다. 이 정도면 수심과 인심이 뭐가 다르고 뭐가 같은지 적이 헷갈린다.
말 못하는 짐승이라고 하지만 그건 사람의 말이다. 이름 없는 풀이라고 하지만 그것도 사람의 말이다. 생명을 저울에 달면 파리 목숨이나 사람 목숨이나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을 거라는 선인의 말씀이 생각난다. 한 편의 이야기가 한 편의 시가 인심을 반성하게 한다.(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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