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두커니/ 박형권
겨울 상추 좀 먹어야겠다고 지푸라기를 덮어둔 산 아래 밭에
상추 어루만지러 어머니 가시고
빵 딸기우유 사서 뒤따라 어머니 밟으신 길 어루만지며 가는데
농부 하나 밭둑에 우두커니 서 있다
아무것도 없는 밭 하염없이 보고 있다
머리 위로 까치 지나가다 똥을 찍 갈겨도 혹시 가슴에 깻잎 심어두어서
까치 똥 반가이 거두는 것인지
피하지 않는다
무얼 보고 있는 것일까
누굴 기다리는 것일까
아무것도 없는 밭에서 서 있을 줄 알아야 농부인 것일까
내가 어머니에게 빵 우유 드리면서 손 한번 지그시 어루만져보는 것처럼
그도 뭔가 어루만지고 있긴 한데
통 모르겠다
뭐 어쨌거나
달이 지구를 어루만지듯 우주가 허공을 어루만지듯
그것을 내가 볼 수 없듯이
뭘 어루만지고 있다
가만히 서 있는 것이 어루만지는 경지라면
나도 내 마음속에 든 사람 꺼내지 않고 그냥 그대로 두고 서 있고 싶다
그냥 멀찍이 서서 겨울 밭처럼 다 비워질 때까지 그 사람의 배경이 되는 것으로
나를 어루만지고 싶다
앞으로는
참을 수 없이 그대를 어루만지고 싶으면
어떤 길을 걷다가도 길 가운데 사뭇 서야겠다
상추 한 아름 받쳐 들고 내려오면 보니 마른 풀도 사철나무도 농협창고도
지그시 지그시 오래 서 있었다
- 『우두커니』, (주)실천문학, 2009.
- 이 시는 상추를 어루만지러 가는 어머니로부터 밭을 어루만지는 농부로 시선을 이동했다가 어머니의 손을 어루만지는 상황으로 이어지고 결국에는 화자 내면을 응시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이처럼 ‘어루만지다’라는 단어가 풍기는 뉘앙스가 이 시의 제재가 되고 있다. ‘어루만지다’의 어원은 중세어 ‘얼다’(교합하다, 성교하다)에서 유래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어루만지고 싶은 마음은 일차적으로는 생산에 대한 욕구이기도 하겠다. 가장 생산적인 일은 새끼를 낳는 일이기도 하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한 바람도 결국은 자식을 위한 바람이 되고, 또 그 자식이 자라서 세상을 어떤 식으로든 변화시키기도 할 것이다.
그렇지만 위 시의 ‘어루만지다’의 어감은 육체적인 끌림보다는 정신적인 느낌이 강하다. 생산에 관계없이 보듬고 아껴주고 싶은 마음이다. 곁에서 혹은 멀찍이 서서라도 오래 지켜봐 주고 싶은 마음이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시인은 세상의 존재들은 알든 알지 못하든 다른 누군가의 어루만지는 손길에 닿아 있을 거라는 인식을 내비친다.
결국, ‘어루만지다’는 사랑이란 말로 대신해도 좋겠지만 너무 흔하게 또 가볍게 말해지는 사랑과는 구별하고 싶어지는 것은 ‘우두커니’ 서서 오래 쳐다보고, 오래 견디는 사랑의 자세가 귀해 보여서이다.(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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