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 이긴다/ 손현숙
외식하고 집에 와서 찬 물김치로 입가심했다 거북했던 옷 활활 벗듯 그제야 속이 좀 편안하다 다니던 길로만 다니고 먹던 음식만 먹고 입던 옷을 입어야 마음 놓이는, 결국은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도 돌아갔다 더듬이를 겨우 내밀어 불륜 같은 사랑을 하고 제각각 집으로 돌아가는 달팽이처럼 시치미 딱 잡아떼고 갔다 가서 된장국에 밥 말아 목구멍으로 술술 잘 넘겼을 거다 어쩌다 구름 위로 그가 지나가는 것 같다 가끔씩 내가 하늘로 고개 꺾는 이유이기도 하다
통점을 알 수 없는 환부가 욱신거린다
꿈속에서도 집요하게 붙드는 그 무엇, 일상은 한시도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쓴맛이 단맛을 이기듯이 그는 순식간에 나를 벗어 버렸다 매혹은 그저 한 끼 식사라는 것, 그에게서 배웠다 억겁처럼 긴 찰나가 지나갔다 배가 고팠다
- 『손』, 문학세계사, 2011.
* 일상과 비일상의 경계가 명쾌한 것은 아니지만, 주어진 테두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쪽이 일상이 될 것이다. 테두리는 그 안의 구성원들이 해야 할 일과 하지 않아야 할 일을 묵시적으로 제시하고 강요한다. 가정 혹은 직장에서 책임과 의무를 다하도록 하고 동시에 안정과 평화를 보장받기를 원한다.
인간의 욕망이 테두리 안에서 발산되고 조절된다면 윤리적일 수는 있겠으나 욕망의 속성상 경계를 넘어다보고 실제 넘기도 할 것이다. 일상에서 비일상으로의 이탈 혹은 일탈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테두리 밖에서 욕망이 충족되는 득의의 시간은 오래 가지 않는다. 위 시의 화자는 ‘외식’이 끝나고 익숙한 집으로 돌아와서야 “거북했던 옷 활활 벗듯 그제야 속이 좀 편안하다”고 했다. 화자가 생각하는 ‘그’도 일상으로 돌아가서 편안해 한다.
화자와 ‘그’는 비일상의 한때를 은밀히 공유했던 사이일 혐의가 짙은데 그 만남은 ‘한 끼 식사’에 지나지 않는 걸로 치부되고 만다. 서로가 일상에 훨씬 더 많은 부분을 남겨 두었기 때문이다. 비일상은 그 자체로 매력이지만 일상을 염두에 둔 비일상은 불안하고, 불편하다. 게다가 도덕적 잣대와 자기 검열을 통해 스스로를 테두리에 가두는 게 일상인의 일상적인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꿈꾸는 자체에 죄를 묻지 않는다. 가족과 밥벌이로부터 파생되는 일상의 양식, 일상의 관계로부터 벗어나 다른 삶, 다른 ‘나’를 생각한다. 이 역시 지극히 인간적인 일상의 고민이다.
일상과 비일상 사이에 “통점을 알 수 없는 환부”가 도사리고 있겠지만, 그 통점과 “배가 고팠다”는 인식만큼 생을 또렷이 증명해주는 것도 없을 것이다.(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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