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사자(凍死者)/ 송찬호
여전히 사내는 눈의 여왕을 기다리고 있다 이제 방은 거의 빙하로 뒤덮였다 저쪽 방 한구석에서 소주 한 병 라면 한 냄비의 보급을 실은 쇄빙선이 몇 번 항진을 시도하다 되돌아갔다
한 가지 불길한 사건이 있었다 난방 배관을 건드린 것인지 방바닥 저 밑을 지나던 잠수함이 기관 고장을 일으켜 수백 미터 얼음 아래 갇혀 있다는 소식이다 아하, 그래서 연탄 보일러가 얼어 터졌구나!
사내는 옷을 몇 겹 더 껴입는다 눈앞에서 환영처럼, 북극의 흰곰이 방을 가로질러 간다 그렇다, 지금은 사냥의 계절! 사내는 자작나무 무늬의 벽지를 두리번거린다 저 숲 간이 피난소 어딘가에 화약과 양초를 숨겨놓았을 터인데,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벌써 여왕이 들이닥칠 시간이다…… 여왕은 한 방울의 하얀 피를 떨어뜨려 꼬죄죄한 몇 벌의 옷과 곰팡이가 핀 벽지의 방 안 풍경을 순식간에 아름다운 설원으로 바꿔놓는다 사내의 얼굴도 피가 도는 듯하다 여왕과의 키스를 기억하려는 듯 입을 벌리고 눈을 반쯤 뜬 채,
어찌 보면 동사(凍死)란 이 계절의 여왕이 낮게 내뱉는 가녀린 한숨 같은 것일 게다 아무튼 사내의 장례는 청색의 관을 준비해야 한다. 요즘 시대 동사자가 생기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니까, 죽어서도 부자들은 가난뱅이들과 섞이려 들지 않으니까,
채찍을 휘둘러 마차의 속력을 더 내야겠다 시간 앞에서는 여왕도 늙는다 여왕의 얼굴도 사라진다
-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문학과지성사, 2009.
* 슬픈 동화 한 편이다. 전체 짜임새는 안데르센의 ‘눈의 여왕’을 연상케 하지만 사내의 처지만 생각해 보면 ‘성냥팔이 소녀’와 가까워 보인다. 생계를 위해 맨발로 거리에 나선 성냥팔이 소녀는 이웃의 무관심 속에 한데서 얼어 죽고 만다. 라면과 소주로 허기를 달래고 시름을 잊었던 사내도 이웃의 얼어붙은 인심과 보일러가 동파될 정도의 혹독한 추위에 결국 동사하고 말았다.
동화 속 ‘눈의 여왕’은 얼음 조각이 심장에 꽂혀서 차갑게 변한 사람을 눈의 성으로 데려가지만, 이 세상이 이미 차갑고 살벌한 눈의 왕국이 되었다면 여왕은 더는 할 일이 없을 거다. 마차는 달리지 않을 것이고 이 세상의 동화는 끝이 나야 한다.
“죽어서도 부자들은 가난뱅이들과 섞이려 들지 않으니까”라는 극적이고 리얼하기까지 한 표현은 현재 진행형인 이 시대 동화의 씁쓸한 단면이다. “낮게 내뱉은 가녀린 한숨”은 자본만 있고, 자본에 따른 빈부만 있고, 빈부에 따른 갈등만 있는 세계를 향한 비판 섞인 걱정으로 읽고 싶다.
그럼에도 성냥불 같은 위안 하나는 얼음 조각을 녹이는 뜨거운 눈물이 어딘가에 고여 있을 거라는 믿음이다.(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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