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철(1904-1938, 광주)
아래는 유영숙의 글이다.
[ 그는 1904년 8월2일 전라남도 광산군 송정면 소촌리 363번지 솔머리마을에서 대지주인 아버지 박하준과 어머니 고광 사이 셋째아들로 태어난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영특함이 돋보여 마을사람들은 그를 천재라 불렀다고 한다. 그는 5살에 사자소학을 깨치고 7살 때는 한글을 깨쳐 신소설을 읽고 수학에 재능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박용철은 18세 되던 해 영랑을 만나기 전까지는 국내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일본 유학 중에도 수학실력이 뛰어나 수학의 천재로 불리며 학우들의 부러움을 샀다.
그러나 1921년 일본 청산학원 유학시절 영랑 김윤식을 만나면서 그의 진로가 이과에서 문과로 180도 바뀐다. 그래서 그는 친구의 권유로 문학을 하면서, 시에 심취하면서 “영랑이 나를 오입시켰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박용철은 1911년 광주공립보통학교(현 광주주석초등학교)에 입학, 1915년에 동교를 졸업한다. 그는 이듬해 4월 휘문의숙에 입학했다가 바로 배재고등보통학교로 전학한다. 여기서 급우 장용하와 염형우를 만나 배재의 3인조로 통하는 친분을 쌓는다. 배재고보 시절 박용철은 역시 수학에서 뛰어난 재주를 보인다. 그러나 그가 4학년 되던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고 어머니의 병환마저 위중해져 그는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으로 내려간다. 그해 겨울 16세인 그는 아버지의 강요에 의해 1살 연하 김희숙과 원치 않는 결혼을 한다. 애초에 결혼을 할 맘이 없던 김희숙과는 혼례만 치렀을 뿐 그녀의 방을 출입하지 않는다.
박용철은 이듬해엔 다시 배재고보에 복학하나 졸업을 하지 않고 일본유학을 준비한다. 그리고 1921년 4월 동경의 청산학원 중학부 4학년에 편입학하게 된다.
여기서 그의 진로를 바꿔놓는 영랑 김윤식을 만난다. 김윤식은 박용철보다 먼저 일본으로 와 청산학원 중학부 5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영랑의 고향은 전남 강진, 용아는 광주다 보니 강진에서 광주의 거리가 200여리 길이라 해도 고향 동지나 다름없이 반갑다. 그때에 한 살 위인 영랑이 용아에게 친구가 될 것을 제안하고 둘은 “용철이, 용철이 다정한 이름이다. 스무 해를 두고 내 입에서 그만치 많이 불러진 이름도 둘을 더 곱아 셀 수 없을 것 같다.(1938년 박용철전집을 펴내며 영랑이 쓴 애도의 글 중에서)” 라고 했을 만큼 평생을 단짝친구로 지냈다.
1923년 3월 청산학원 중학부를 졸업한 그는 4월 동경외국어학교 본과 독어부에 입학, 1학기를 마치고 방학을 이용해 귀국하나 일본에서 일어난 관동 대지진으로 인해 학업을 중단하고 그해 9월, 연희전문학교 문과 1학년 2학기로 편입학한다. 여기서 그의 문학 수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는 연희전문에 입학하여 염형우 등과 수학하며 위당 정인보에게 시조를, 일성 이관용으로부터 독일어를 배우며 문학수업에 재미를 늘려간다. 수주 변영로도 여기서 만나 후에 시문학 동인이 된다.
한편 그는 염형우를 통해 우리나라 최초의 소프라노 윤심덕과도 친분을 맺는다. 윤심덕과의 교분은 그녀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가끔 그의 가족을 찾아가곤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영랑의 권유로 진로를 바꿔 문학에 입문했으나 영랑과 다르게 그의 시작(詩作) 처음은 시조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의 시에서는 시조의 율격을 염두에 둠으로 인해 자유시의 표현범위가 한계에 갇혀 확장되지 못하는 아쉬움을 남긴다. 이를 가장 못마땅하게 여긴 사람은 영랑이다. 영랑은 “시조를 쓰고 그 격조를 익혀놓으면 우리가 이상하는 자유시 서정시는 완성할 수 없다.” 라고 박용철의 시조창작을 극구 반대했다.
나 두 야 간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 거냐
나 두 야 가련다
안윽한 이 항구-ㄴ들 손쉽게야 버릴거냐
안개가치 물어린 눈에도 비최나니
골잭이마다 발에 익은 뫼ㅅ부리 모양
주름살도 눈에 익은 아- 사랑하든 사람들
버리고 가는 이도 못 닛는 마음
쫓겨가는 마음인들 무어 다를 거냐
도라다보는 구름에는 바람이 희살짓는다
압대일 언덕인들 마련이나 잇슬거냐
나 두 야 가련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거냐
나 두 야 간다
-<떠나가는 배> 전문
1930년 <<시문학>>지 창간호에 실린 박용철의 대표작이다. 화자는 첫 행부터 떠나려는 자신의 의도에 힘을 실어 단호하게 소신을 밝힌다. 그러나 자신을 품어주던 아늑한 항구며 골짜기마다 눈에 익은 묏부리, 주름살도 눈에 익은 사랑하던 사람들을 두고 떠나야 하는, 버리고 가는 이도 못 잊는 심사다.
한편 앞대일 언덕인들 마련이나 있을 거냐 라는, 앞이 보이지 않는 불확실한 여정이다. 그러나 나의 이 젊은 날을 눈물로야 보낼 수 없어 나 두 야 간다 라고 한 자 한 자 마디를 주어 단호한 의지를 보이는 시다. 시인은 창작 경위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그것을 지을 때의 경로로 보면 상징의 본격을 간 것 같네. 꿈같이 드러누운데 어쩐지 눈물 흘리며 떠나가는 배가 보이데. 그저 떠나가는 배일 뿐이야. 그래 그대로 풀어놓은 것이 그 시가 되었네. 잘잘못은 두고라도 성립의 과정은 상징의 본격이야….” 이에 대해 영랑은 “…사랑과 문학을 향한 열정의 출발일 따름이다. …사랑과 시가 이 싸늘한 시인에게 표리의 관계로 은밀히 타올랐던 것” 이라고 했다. 용아와 주고받은 수십 통의 편지를 연서라고 할 만큼 우정이 두터웠으나 시평에 있어서만은 냉철했다.
용아는 이 시를 발표하기 전 희곡은 이미 여러 차례 발표한 바 있지만 그가 일심으로 지향한 문학, 즉 창작시 발표의 시작은 여기서 출발한다. 따라서 그가 우리문학사에 공헌한 바 큰 문예운동도 이때부터 시작된다.
“시란 한낱 고처(高處)이다.” 라고 말한 만큼 시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갖고 있었던 박용철이지만 그는 시인으로보다 시론가로, 비평가로, 또한 일찍이 번역문학에 앞장선 우리 문학의 공로자로서 높게 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그가 궁극적으로 문학의 길에 접어든 것은 좋은 시를 쓰고자하는데서 비롯되었다. 그러니 시론이나 번역서들은 그가 자신의 성격처럼 명확한, 명작을 쓰기 위한 염원에서 얻어진 부수적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또 하나의 근거는 그가 <<시문학>> 창간호 편집후기에서 밝힌 글에서 엿볼 수 있다. 그는 “우리는 詩를 살로 색이고 피로 쓰듯 쓰고야 만다.
우리의 詩는 우리 살과 피의 맺힘이다.” 라고 했다. 수학의 천재로 인정받던 그가 진로를 바꾸기까지는 갈등도 없지 않았겠으나 일단 문학의 길로 접어든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시를 쓰겠다고 매달린다.
고향은 찾어 무얼하리
일가 흩어지고 집무너진데
저녁 가마귀 가을 풀에 울고
마을 앞 시내도 事美盌바뀌었을라.
어린 때 꿈을 엄마 무덤 우에
남겨두고 떠도는 구름따라
멈추는 듯 불려온지 여나무해
고향은 이제 찾어 무얼하리.
하날가에 새 기쁨을 그리어보랴
남겨둔 무엇일래 못잊히우랴
모진바람아 마음껏 불어쳐라
흩어진 꽃닢 쉬임 어디 찾는다냐.
험한 밭에 짓밟힌 고향 생각
-아득한 꿈엔 달려가는 길이언만-
서로의 굳은 뜻을 남게 앗긴
옛사랑의 생각같은 쓰린 심사여라.
-<고향> 전문
<<문예월간>> 창간호에 발표한 용아의 <고향>은 같은 시대에 씌어진 정지용의 <향수>나 영랑의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과 같은 포근한 고향이 아니다. 용아는 학교든 거처든 이곳저곳을 많이 옮겨 다닌다. 연희전문학교도 1년을 다니곤 휴학한다. 그리곤 혼자 금강산을 다녀오고 고향으로 간다. 하지만 그에겐 고향도 편한 곳이 못된다. 일가도 흩어지고, 집 무너진, 험한 밭에 짓밟힌 그런 고향이다. 그러나 아주 등지진 못하고 아득한 꿈엔 달려가는, 쓰린 심사의 고향길이다. 그는 왜 고향에도 안착하지 못하고 학업도 중도에 그만 두었을까. 그의 안정을 방해하는 요인 중 하나는 원치 않았던 결혼이 문제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어머니의 병환이 위중해지자 큰살림을 맡아 할 안주인의 부재를 염려한 아버지가 서둔 결혼도 그렇지만 신교육을 전혀 받지 않은 사람을 반려자로 맞는 것이 용아는 못마땅했다. 그는 한때 가정교사를 들여 여동생(봉자)과 함께 아내에게도 교육을 받게 한다. 하지만 그녀는 19세까지도 숫자를 헤아리지 못할 정도로 낮은 지적능력을 지녔었다고 하니 지식인 용아로선 답답하기 그지없는 노릇이다. 그는 이혼을 하려하나 ‘그녀는 그대로 두고 소실을 들이라’는 아버지와의 생각 차이로 이혼도 쉽지 않았다.
문화해설가 문대식 님의 안내를 받아 지금은 광주시 광산구 소촌동으로 주소가 바뀐 용아생가에 도착했다. 대지주의 주택답게 행랑채와 사랑채 안채 별채 등으로 지어졌으며 원형보존이 잘 돼있다. 문대식님은 안채와 사랑채를 번갈아 가리키며 “용아선생이 서울서 내려오시면 안채로 들지 않고 사랑채에만 머무셨다고 합니다.” 라며 씁쓸한 표정을 짓는다. 용아생가는 1986년 광주광역시사적 제13호로 지정되었고, 1995년에 기와를 걷어내고 용아 생존 당시의 초가로 복원하였다.
생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송정공원에 용아 시비가 세워져 있다. 이곳 송정공원은 시민들이 자주 찾는 곳으로, 용아시비가 있는 동산을 오르다보면 오른 편으로 이 지역 출신 소리꾼 임방울선생의 비도 세워져 있다. 용아시비는 돛을 올린 배의 형상으로 조형되었다. 돛에 <떠나가는 배>가 수록되어 있고 용아의 인물(부조)이 들어가 있다. 용아의 시비는 이곳 말고도 광주공원 시인동산에도 있다. 시인동산 시비는 1970년에 영랑시비와 나란히 세워져 그들의 우정을 다시 한번 되짚어 보게 한다.
시인의 유택은 광주 우산동에 있다. 내비게이션의 안내로 우산동 3번지는 찾아갔으나 주변에 묘지안내판은 물론이고 입구표시조차도 되어있질 않아 한참을 헤매다 공동주택 마당을 통해 들어가니 묘지로 통하는 좁은 산길이 있다. 문대식님의 기억을 더듬어 묘지로 오르니 그의 묘소임을 표시하는 시인의 이름 석 자 새겨 넣은 비석 하나 없이 봉분만 둘(임정희여사와 함께) 뎅그러니 있다.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걱정 없이 자랐을 법한 박용철의 시는 대부분 어둡고 애상적이다. 그러나 그는 그가 깔아놓은 비애에 속수무책 말려들지 않고 오히려 초연하다.
가끔 가끔(새삼스리)
살기가 싱거워집니다
그렇다고
애써 죽기야 또 어찌합니까
그러기에
한 다리를 끌고 절룸발이 걸음을 걷습니다
잊고 살다가도
돌이켜보면 싱거웁지요
애써 살값도 없지요마는
그렇다고
애써 죽기는 또 힘들지요
우리 웃음은 속이 비이고
기쁘단 말은 字典에서도 지워지오
나는 아주 悲觀하기로 결심을 했소
-<斷想.1> 전문
강한 부정은 긍정이라고 하던가. 그가 비애를 아주 비관하기로 한 결심은 오히려 그 비애에 묶이지 않고 초월함이다. 그러니 한 다리를 끌고 절룸발이 걸음을 걸어도 조금도 두렵거나 조급할 게 없다. 삶의 갈등에서 초연해진, 내려놓음의 경지에 다다른 삶인 것이다.
다음은 그의 작품 중 비교적 밝은 느낌의 시를 골라 보았다. 짧은 시 <연애>에는 어떤 감정이 숨어 있을까.
어제 날이 채 가지도 않아
또 새로운 날이 부채살을 펴는 나라 오-로-라
언덕에는 꽃이 가득히 피고
새들은 수없이 가지에서 노래한다
-<연애>
수학적 논리와 냉철한 이성의 소유자 박용철은 연애 시에서도 감정표현을 지극히 절제하고 있다. 어제 날이 채 가지도 않는, 밤을 지새우는 가슴 속 뜨거운 사막과 같은 열정은 감추고 부챗살을 펴는 나라 오-로-라와 같은 현상으로만 표현한다. 그러나 건강한 연애 감정만은 감출 수 없다. 그의 시에서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 꽃 가득히 피고, 새들은 수없이 가지에서 노래하는 활기찬 시구에서 화자의 내면에 이는 감정을 엿볼 수 있다.
박용철의 문학은 독일 낭만주의 문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독일 낭만주의는 1920년대 자연주의, 예술지상주의, 상징주의 등의 문학 경향이 혼돈을 이루는 가운데 한국 낭만주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박용철이 문학 활동을 시작한 1930년대 초기 그 기틀이 확립된 셈이다. 독일어를 전공한 박용철은 하이네의 시를 번역하며 집중 관심을 가졌다. 이는 낭만주의가 독일 정신의 근본 요소이며 생의 원천임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한과 은근으로 대표되는 우리 문학의 주정적 문학전통과 맞갖을 수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런 박용철은 외국 시 번역에서도 언어적 선택에 신중을 기했다. 그는 민족어 발전에 뜻을 두고 있었기에 될 수 있으면 한자어를 배제하고 순수한 우리말을 사용하였다. 그의 번역 시 가운데에는 종결어미를 우리 어투로 바꿔 번역한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박용철은 시를 창작하는 일에만 매달리지 않고 시론이나 비평도 많이 썼다. 그는 동시대의 시인들 김영랑. 정지용. 신석정 등의 시에 대해선 극찬을 아끼지 않았으나 김기림의 시에 대해선 혹평을 했다. 특히 김기림의 <氣象圖>에 대해선 “시인의 경복할 만한 노력과 계획에도 불구하고 시인의 정신의 연료가 이 거대한 소재를 화합시키는 高熱에 달하지 못하고 그것을 겨우 접합시키는데 그쳤든 것 같다. 그 중에서도 필자의 가장 불만인 점은 이 詩가 명랑한 아침 폭풍경보에서 시작해 다시 명랑한 아침 폭풍경보해제에서 끝나는 완전한 左右同形的 구성이다.” 라고 혹평을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비평의 공방은 김기림과 박용철의 맞대결이 아니라 박용철과 김기림, 임화의 3파전이 되었고, 김기림과 박용철 사이에 임화가 끼어들어 박용철과 김기림이 아니라 박용철 대 임화가 되어 공방을 벌였던 것이다.
박용철의 문학 열정은 누구보다도 뜨거웠다. 창작이나 시평뿐만 아니라 문예지 발간에는 본가에서 매달 올라오는 200원 중 30원 정도만 생활비로 쓰고 나머지는 모두 문예지(시문학, 문예월간, 문학 등)발간에 쏟아 부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열정에도 불구하고 문예지 발행은 창작원고 부족 등으로 인해 순조롭게 이어지지 않았다. <<시문학>>은 3호 종간되고, 뒤이어 창간한 <<문예월간>>은 4호로, <<문학>>도 3호로 종간되고 만다.
그는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정지용시집>>과 <<영랑시집>>을 호화판 장정으로 출판하였으며 이하윤의 번역시집까지 시문학사 편으로 간행했으나 정작 살아생전 자신의 시집은 세상에 내놓지 않은 겸허한 시인이었다. 박용철의 시의 고향은 빈틈없는 논리적 사고와 냉철한 이성, 내면의 고독과 비애를 초월하는 정신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건강이 좋지 않았던 그는 병원을 전전하다 1938년 5월 12일 후두결핵으로 사직동 자택에서 타계한다. 여동생(봉자)의 소개로 만나 재혼한 임정희 여사(이화여전 영문과를 졸업)와의 사이에 3남을 두었다.
이듬해 1주기를 즈음하여 <<박용철전집>>1권이 나오고 다음 해 전집 2권과 평론집이 시문학사에서 간행된다. 2005년 박용철문학상이 제정되어 매년 5월 광주광역시에서 행사를 열며 그의 문학정신을 기리고 있다.]
아래는 신웅순의 글이다.
[ 광주는 동쪽의 무등산, 북쪽의 병풍산과 삼각산, 남쪽의 금당산, 서쪽의 어등산과 용진산으로 둘러싸여있는 분지이다. 영산강 지류중의 하나인 황룡강의 잉어가 승천하여 용이 되어 올라갔다는 어등산. 어등산 남쪽 끝자락에 솔머리 마을이 있다.
어등산은 경치가 빼어나 송순의 면앙정가에도 그 이름이 나온다. 어등산 너머 어등 낙조는 연인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솔머리 마을은 누구든 시인이 아닌 사람이 어디 있으랴. 용이 머물렀던 어등산 자락, 송정면 소촌리 363번지에서 1904년 용의 해에 박용철이 태어났다.
35세의 짧은 나이에 62편의 자유시와 12편의 시조, 13수의 한시 등 총 100여편의 시를 남겼다. 342편의 시, 2편의 소설, 7편의 희곡을 번역했으며 13편의 굵직한 시론과 4편의 창작 희곡을 남겨놓았다. 그의 생애에서 10년 남짓 동안 이 모든 문학들을 처리했다.
광주 송정 공원에 박용철 시비가 있다. 송정 공원 언덕길 오른쪽엔 국창 임방울 선생 기념비가 있고 왼쪽 바로 위엔 박용철의 시비가 있다. 박용철 시비에는 얼굴 부조와 함께 『시문학』창간호에 실린 「떠나가는 배」가 새겨져 있다. 뒷면에는 손광은의 용아 약전, 하남호의 글씨, 고정수의 설계 및 조각과 경철의 선, 임영배의 자문으로 되어 있다. 고체의 우아한 글씨체로 현대어 어법에 맞춰 우에서 좌로 내려썼다.
‘나두야 간다’ 단호한 이 한 마디. 현실을 탈출하기 위해서였을까? 막연히 남들도 떠나니 나도 떠나야 한다는 것일까? 가야할 목적도 없이 간다는 것은 당시 지식인의 공통된 현상이었다. 눈물로야 보낼 수만은 없다. ‘나두야 간다’는 단단하고 의기에 찬 의지. 여기에 덧붙일 해석이 어디 있으랴. ‘나두야 간다’는 이 한 마디면 되지 무슨 사족이 필요하랴. 용아가 가야할 곳은 시창작, 문예운동, 비평, 번역 활동, 연극 운동였다. 함축적으로 짧게 살다간 용아의 일생이 이 시 한 편에 다 있다면 지나친 말일까?
또한 광주 시민 공원에는 순수시의 거장 영랑과 순수 시론의 거장 박용철의 시비가 서 있다. 민체로 깔금하게 쓴 왼쪽엔 용아 시비 「떠나가는 배」가 오른쪽엔 영랑 시비 「모란이 피기까지는」가 나란히 서 있다. 시문학파의 쌍벽을 이룬 그들의 우정을 영원히 기리기 위해 세웠다.
주전이의 『시인 영랑 김윤식 전기』에서 동경 유학 시절 박용철과 김윤식과의 만남 상황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11월 윤식은 청산학원 생활을 익혀가던 어느 날 외국어 강좌를 마치고 교문을 나오고 있었다. 교문을 앞서 나온 일본 학원생들이 누구인가를 지적하며 지껄여대는 소리에 발 걸음을 멈추었다.
“그 놈 조센징 말이야. 용철이란 놈이 수학과 수석이야.”
“조센징, 전라도 삐쩍 마른 새끼 말이야.”
떠들어대며 교문을 빠져 나오고 있었다. 윤식은 달려가
“말 좀 물읍시다. 용철이란 학생이 혹시 조선학생 아니오?”
“용철이란 놈 말이요? 고향이 조선 전라도 광주 어디라는데……”
“예, 알겠오.”
윤식은 조선 전라도 광주라는 소리에 깜짝 놀라 서쪽 후관 삼층 강의실로 뛰어 올라갔 다. 강의 시간은 이미 끝나고 몇 학생들만 남아 있어 용철이의 행방을 물었다. 용철이가 교수 본부실로 갔다는 것이었다. 교수 본부실 앞에 다가갔는데 조금 마른 듯한 학생이 어느 교수와 손을 마주 잡고 인사하며 나오고 있었다. 윤식은 단숨에
“혹시 용철씨 아니오.”
“그렇소. 뉘신지요?”
“제가 전라도 출신 김윤식이오.”
“아, 그러신가요. 박용철입니다.”
“박형 고향은 어딘가요?”
“저는 전라도 광주 송정리요.”
“저는 전라도에서 제일 끝 강진이오.”
두 사람은 가슴을 끌어안고 한참이나 떨어질 줄 몰랐다.>
그들은 망국의 설움 속 이국에서 이렇게 설레는 가슴으로 만났다. 학업에 열중하며 음악회, 영화관, 학예반 등을 같이 돌아다니며 그들은 서로의 우정을 쌓아갔다. 그 우정은 훗날 순수 문학의 시발점이 되었고 한국 시문학사에 굵직한 선을 그어 놓았으며 사후엔 광주 시민 공원의 쌍둥이 시비로 나란히 서 있다. 또한 강진의 ‘모란촌’ 동인, 광주의 ‘떠나가는 배’ 동인으로 이어지고 있으니 아름다운 것이 어찌 예술 뿐이랴.
박용철은 두뇌가 명석할 뿐만 아니라 관찰력과 판단력이 예리하고 수학의 천재였다. 용아는 교우 관계가 원만하였고 남을 간여하지 않았고 웬만한 경우 논쟁을 피했으며 타인의 비평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초등학교 시절 개근상과 우등상으로 과자 등속을 받아오면 박용철은 손수 하인들에게 나누어주곤 했다. 정지용과 김영랑의 시집을 먼저 출판해주고도 정작 자신의 시집은 출판하지 않았던 박용철. 1938년 35세, 후두 결핵으로 요절하고 말았다. 언제나 남을 먼저 배려하는 그의 따뜻한 성품. 그는 따뜻한 휴머니스트였다.
박용철은 그 많은 시창작, 창작 희곡, 비평, 외국시, 희곡 번역 등 많은 작품들을 놓고 떠났다. 이는 몇 개 국어는 물론, 문학, 경제, 사회, 철학 모든 인문 과학에 이르기까지 여러 분야를 섭렵하지 않으면 매우 어려운 작업들이었다.
류복현의 『용아 박용철의 예술과 삶』에서 당시 용아의 학문 과정을 다음과 같이 전해주고 있다.
<영어와 독일어 문법,일어․영어․독일어로 된 시집과 소설 그리고 희곡,한시 및 시조, 작문법, 아동문학,헤겔과 니체를 비롯한 독일 철학,경제학원론,언어학개론,역사,성경,사회 학 등 실로 공부의 영역이 매우 다양하고 방대하다 할 수 있겠다. 이러한 틀실한 기초학 문의 탁마가 밑거름이 되어 후일 용철로 하여금 시창작 뿐만아니라 외국시와 희곡의 번역, 비평에 이르는 다양한 문학 활동을 가능케 하였다.>
용아는 16세 때에 아버지의 명으로 울산 김씨 김희숙과 결혼했다. 일자무식 본부인과는 걸맞는 배필이 아니었다. 결국은 본부인과 이혼하고 이화여전 출신 임정희와 결혼했다. 이것이 당시 지식인들의 갈등이었으며 자화상이기도 했다.
김영랑과 정지용이 주연이라면 용철은 빛나는 조연이었다. 용아의 순수 시론이 있었기에 그들의 순수시는 더욱 아름다운 빛을 발했다. 그들 시집을 손수 출판해주었고 시론과 비평으로 시문학파의 밑거름이 되었으며 많은 외국시와 소설, 희곡을 번역, 서구 문학의 첨병 역할을 했다. 그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였다.
주연을 위한 조연의 역할은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가. 조연으로 주연은 다시 태어나는 법.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 수 없었던 어려웠던 그 시대, 영랑이가 용아를 오입시켰다던 그 문학이 삶의 전부가 되어버린 용아. 그는 아름다운 조연으로서 순수시와 시인을 위한 비평을 아끼지 않았고 많은 외국시와 소설, 희곡 등을 번역했으며 오로지 문학만을 위해 온 생애를 소진시켰다. 그는 시인이었고 비평가였으며, 번역가였고 극예술 운동가였으며 또한 출판가이기도 했다.
병상에서 휴지 조각에 꾹꾹 눌러 쓴 마지막 4편의 시 중의 「인형」을 소개한다.
나를 좀 보셔요
나를 좀 보셔요
나를 좀 만져 보서요
손끗이 정말 자릿하지요
웨 나를 위해 베아트리체의 시를 쓰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가요.]
'문인 일화(ㅂ-ㅇ)'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인로(1561~1642, 경북 영천) (0) | 2011.08.26 |
---|---|
이조년(1269-1343, 성주) (0) | 2011.06.04 |
신흠(申欽, 1566~1628, 한성부(서울)) (0) | 2011.03.24 |
윤후명(강원도 강릉, 1946-) (0) | 2011.01.07 |
안정복(1712-1791, 경기도 광주) (0) | 2010.10.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