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조년(1269-1343, 성주)
이래는 성주신문에 실렸던 민경탁의 글이다.
[성주는 예로부터 선비와 명현이 많이 배출되고 있는 고장이다. 자랑할 만한 이 고장의 인물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높이 기리어야 할 한 사람이 있다. 한국의 역사에 숱한 위인, 명인들이 있었지만 성주인이라는 것을 꼭히 알고 있어야할 한 인물이 있다. 아래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고려 공민왕 때의 일이다. 형제가 함께 길을 가다가, 아우가 황금 두 덩이를 주워서 형에게 하나를 주었다. 나루터에 와서 형과 함께 배를 타고 건너는데, 아우가 갑자기 금덩이를 강물 속으로 던지므로 형이 괴이하게 여겨서 물었다. 아우가 대답하기를, “제가 평소에 형님을 독실하게 사랑하였는데, 이제 금을 나누어 가진 다음에는, 형님을 꺼리는 마음이 갑자기 생깁니다. 이것은 상서롭지 못한 물건이라, 강에 던져서 잊어버리는 것이 낫겠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형도 “네 말이 참으로 옳다.” 하고, 또한 금덩이를 강물에 던져 버렸다. 그 때 같은 배에 탔던 자는 모두 어리석은 사람들뿐이었던 까닭에, 그 형제의 성씨와 거주하는 마을을 물은 사람이 없었다 한다.
형제투금(兄弟投金) 또는 투금탄 전설로 전하는 이야기이다. 원래 「신증동국여지승람」권10 양천현(陽川縣) 산천 공암진(孔巖津) 편에 전한다. 공암진 터는 현재 서울시 강서구 가양2동 구암공원(일명 허준 공원. 구암은 동의보감의 허준 선생 호)에 있는데 그 안내문에도 이 이야기는 소개되고 있다. 현행 초등학교 3학년 1학기 국어교과서에도 실어 가르치고 있다.
고려 말에 개성 유수(현 서울특별시장급)를 지냈던 이억년 선생이 벼슬을 버리고 경남 함양군으로 낙향할 때, 그 동생 이조년 선생이 한강 나루 건너까지 배웅해 주다가 생긴 일이었다. 지금의 구암공원 서문 밖 공암나루터에서 있었던 일이다. 조선 후기의 문신 황덕길(1750~1827)의 시문집 「하려집(下廬集)」에 의하면 이 이야기는「성주이씨 가승(星州李氏家乘)」에 이조년 · 이억년 형제의 이야기로 기록하고 있다고 전한다.
이조년(1269-1343) 선생은 고려말의 문신으로 호는 매운당(梅雲堂) 또는 백화헌(百花軒),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성주 이씨 이장경의 5형제 중 막내였다. 형제들의 이름이 이백년(李百年), 이천년(李千年), 이만년(李萬年), 이억년(李億年), 이조년(李兆年)이었다. 5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했으며 이 중에 천년, 만년, 조년이 출중하였는데 이조년 선생이 가장 빼어났었다. 형제들 간의 우애가 남달랐다고 한다.
「신증 동국여지승람」 권28 성주 인물 편은 이 이조년 선생을 더욱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선생은 고려 충렬왕-충혜왕 때 원 나라에 내왕하면서 국가에 공을 세웠고 예문관 대제학을 거쳐 공민왕 때 성산군으로 책봉되었다. 선생의 키는 작았는데 성품이 치밀하고 용감하였으며, 의지가 굳세고 심지가 대담하였을 뿐만 아니라 매사에 엄격하여서 임금에게 거리낌 없는, 직간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충렬왕· 충숙왕· 충혜왕 임금들께 목숨을 내어 건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 임금께 대제학으로서 충성스런 간언을 하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벼슬을 내어 놓고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 왔다.
퇴계 이황은 이조년 선생을 가리켜 ‘그는 난세에 태어나서 수많은 변고와 험난을 겪으면서도 혼미한 임금을 받들어 지조가 금석 같았고 충직한 깊이가 후세에 우뚝하여 고려 500년 역사의 제1인자’라고 찬양하였다.
이 이조년 선생이 고려 말에 향리인 성주로 돌아와 머물면서 청빈하고 고독한 심경을 읊은 시조 한 수가 있다. 일명 ‘다정가(多情歌)’로 불리는 작품이다.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 은한(銀漢)이 삼경(三更)인제
일지춘심(一枝春心)을 자규(子規)야 알랴마는
다정(多情)도 병(病)인양 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현대어로 풀이해 보면 이렇다.
하얗게 핀 배꽃에 달은 환히 비치고 은하수는 돌아서 자정을 알리는데
배꽃 한 가지에 어린 봄날의 정서를 두견이 알고 저리 우는 것일까마는
다정다감(多情多感)한 나는 그것이 병인 양, 잠을 이루지 못하여 하노라.
지금도 고등학교 문학 교육과정에서 가르치고 있는 고려 말의 시조로 봄밤의 애상적인 정감을 노래한 작품이다. 이조년 선생이 벼슬에서 물러나 성주에서 만년을 보낼 때에 나라와 임금의 일을 걱정하여 잠 못 이루는 심정을 읊은 시조이다. 조선 말 헌종 때의 시인 신위(申緯)의 시집에 한역되어 전하기도 한다.
이 시조에는 배꽃과 달과 은하수, 두견새의 소리가 조화되어 봄밤의 애상이 감미롭게 흐른다. 그 시각과 청각 이미지로 조화된, 지향할 수 없는 봄밤의 서정이 시적 자아를 잠 못 들게 하고 있다. 자신의 충정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상태에서의 봄밤, 잠 못 들 수밖에 없다. 어이 다정다감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잠에 들 수 있으랴. 작자는 이러한 봄밤의 애상을 전지적 작가시점에서 잘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이 시조는 고려시대 시조 가운데 표현기법이나 정서면에서 문학성이 가장 빼어난 작품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 성주인이 낳은 국문학사상의 명작이라 하겠다.
고려 말의 학자요 정치가였던 이조년 선생은, 금권이 날로 팽배해 가는 이 시대에 우리가 본받아야 할 우애와 충직의 인물이었다. 성주가 낳은 우애와 충직의 화신이었다. 이조년 형제 투금 스토리는 성주에서 더 많이 창출해 낼 수 있는 부가가치의 콘텐츠가 된다. 이 이야기를 더욱 다양한 교육 자료로, 역사와 문화의 콘텐츠로 개발하여 활용할 필요가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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