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시

동피랑에 오면

톰소여와허크 2011. 4. 20. 21:04

 

 

 

동피랑에 오면/ 이동훈


동피랑에 오면 통영이 보인다

강구안을 내려다볼 것 같으면
서귀포 앞바다와 남덕이 그리운
이중섭의 봉두난발이 보이고

항구에 철선이 닿을 때면
오르내리는 손님과 화물을 좇는
김춘수의 반짝이는 눈빛이 보이고

서문고개와 세병관 사이
아버지 집을 멀찍이 돌아서 지나는
박경리의 가여운 자존심이 보이고

길 건너 이층집을 보며
중앙우체국에 편지 부치러 가는
유치환의 은은한 연애가 보이고  

명정동의 난이를 잊지 못해
술에 취해 시장 거리를 헤매는
백석의 닿을 데 없는 유랑이 보이고

통영에 오지 못하고
통영의 멸치와 흙 한 줌에 울었다는
윤이상의 서러움이 보이고

벽마다 꽃 피는 동피랑에 오면
중섭과 중섭의 사랑이
통영과 통영의 사람이
무채색 파노라마로 보인다.

 

 

*

   지난 세모 통영항 맞은편의 ‘동피랑’ 벽화마을을 찾았었다. 동피랑은 ‘동쪽 피랑(벼랑)’에 자리한 마을이란 뜻이다. 일제강점기시절, 통영 중앙시장에서 주로 일하던 인부들이 모여 살면서 자연스레 동네가 형성되었다. 현재 50여 가구가 살고 있는 이 마을은 원래 철거예정지인 달동네였다. 이곳은 조선시대 이순신 장군이 설치한 통제영의 동포루(東砲樓)가 있던 자리로, 통영시는 낙후된 마을을 철거하여 동포루를 복원하고 주변에 공원을 조성할 계획이었다. 딱히 이주할 곳이 마땅찮고 형편도 여의치 않아 마을주민들의 근심은 깊어만 갔다.

 

  이러한 사정을 접한 ‘푸른통영21’이란 시민단체가 혹시 아름다운 마을로 꾸미면 철거되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주민들의 소박한 바람을 담아 2007년 첫 벽화공모를 했다. 이렇게 해서 몇 차례 추가공모를 거쳐 초중고생부터 전국의 미대생, 전업화가까지 여러 팀들이 참가하여 낡은 담벼락에 색을 입혀왔다. 벽화로 꾸며진 마을에 대한 입소문이 나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하고, 마을을 보존하자는 여론이 형성되자 통영시는 마침내 동포루 복원에 필요한 마을 꼭대기의 집 3채만을 헐고 마을 철거방침을 철회하였다. 개발을 둘러싼 자본의 야욕이 불러온 용산 철거민참사의 비극으로 온 나라가 들끓을 때였다.

 

   동네 전체가 색을 입은 동피랑은 통영의 새 명물로 거듭났다. 철거대상이었던 동네가 미술공공프로젝트에 힘입어 통영의 새로운 명소로 탈바꿈하고, 매스컴에도 소개되어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전국에서 벽화열풍이 불고 있지만 동피랑 만큼 지형지물과의 절묘한 조화가 잘 구현된 곳도 없을 것이다. 동네가 시작되는 곳에서 가파른 계단을 오르기 시작하면 겨우 한 사람 지나갈 정도의 좁고 꼬불꼬불한 골목길은 마치 동화 속 작은 미로 같았다. 아름다운 통영 앞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지점에는 어린왕자와 장미 벽화가 그려져 있다.

 

   그리고 통영이 고향인 김춘수와 박경리, 유치환과 윤이상이 옹기종기 다 모여 있다. 고향은 아니지만 백석은 ‘남쪽 바닷가 어떤 낡은 항구의 처녀’를 찾아 몇 차례 통영나들이 후 통영을 시로 남겼고, 화가 이중섭은 서귀포와 부산에서의 피난생활을 거쳐 2년 남짓 통영에서 생활하며 작품 활동을 한 인연이 있다. ‘통영과 통영의 사람이 다 보이’는 ‘동피랑’은 작고 낡고 가난한 동네지만 큰 바다와 꿈과 희망이 함께 살아 숨 쉬는 마을이다.

(권순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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