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희(1942 ~, 경기도 가평 )
아래는 최을영의 글을 일부 줄인 것입니다.
[조세희의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공』(이하 난쏘공)이 2007년 8월 100만 부를 넘어섰다. 1978년 6월 5일 문학과지성사에서 초판이 발행된 지 29년 만이다.(2000년부터는 도서출판 이성과힘에서 출간) 1990년대 초에 100쇄를 돌파했던 『난쏘공』은 2007년 8월 현재 228쇄, 100만 부를 돌파하며 그 긴 생명력을 자랑하고 있다.
“책을 내고서 작고한 평론가 김현을 출판사 근처 다방에서 만났어요. 김현은 ‘밤새워 읽었다. 좋다. 8000부는 나갈 거다’라며 흥분하더군요. 그게 벌써 30년 전입니다.”
밤새워 『난쏘공』을 읽고 흥분했다던 김현의 예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난쏘공』은 30여 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많은 이들의 책장에 자리를 잡았고, 그와 함께 조세희란 이름도 사람들의 가슴에 자리를 잡았다. 김현처럼 밤새워 『난쏘공』을 읽었든, 그렇지 않든 간에 『난쏘공』은 꾸준하게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으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별다른 책 광고도 없이 출간된 지 30여 년이나 지난 책이 아직도 꾸준히 팔리고 있다는 사실은 『난쏘공』이 주는 울림이 여전히 유효함을 반증한다. 조금만 눈을 돌려보면 여전히 우리 사회에 ‘난쟁이’ 가족 같은 이들은 존재한다. 조세희는 그 부분을 강조한다.
“처음 책을 낼 때는 몇 부가 팔릴 거라는 예상보다는, 검열에 걸리지 않고 세상에 나가 제 몫을 다할 수 있기만을 바랐어요. 이제 30년이 지나 쑥스러움을 무릅쓰고 (‘100쇄 기념판’ 출간 같은) 흉한 짓을 하는 이유는 지금 젊은이들에게 하고 싶은 얘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사회가 풍요롭고 자유로워진 것 같지만, 『난쏘공』을 처음 내던 때와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은 없다고 봅니다. 난쟁이 가족의 불행은 아직 끝나지 않은 거죠.”
난쟁이 가족의 불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에 조세희는 방점을 찍는다. 그리고 그는 젊은이들에게 그 얘기를 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 조세희는 암울했던 1970년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난쟁이 얘기를 전하려 하고 있다. 때로는 글로, 때로는 행동으로 말이다.
조세희는 1942년 8월 20일 경기도 가평에서 출생했다. 어린 시절 그의 집에는 양장본으로 된 세계문학전집이 있었다. 조세희는 이 책들을 탐독하며 문학 청년 시절을 보냈는데 특히 그가 아꼈던 책은 포크너의 소설 『음향과 분노』였다고 한다. 얼마나 아꼈는지 『음향과 분노』만은 절대 다른 이들에게 빌려주지도 않았다고 한다. 조세희의 서라벌예대(현 중앙대) 1년 선배인 소설가 김원일은 “세희가 아마도 『음향과 분노』를 한 열 번은 읽고 달달 외웠을 것”이라며 “『음향과 분노』에서 백치 벤지의 눈을 빌려 서술되는 짧은 문장들과 『난쏘공』의 단문들이 서로 관련되는 것 아니겠는가”라고 짐작하기도 했다.
1953년 서울로 올라온 조세희는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에 들어갔다가 경희대 국문과에 다시 들어갔다. 한국 문학의 양대 사관학교라 불리는 두 학교를 모두 거쳐간 것이다. 소설에 대한 그의 욕심은 남달랐고,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한 뒤 그는 스물세 살의 나이로 196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단편 「돛대 없는 장선」이 당선되면서 문학계에 입문했다. 그러나 조세희의 작가로서의 길은 순탄치 않았다. 「돛대없는 장선」이 당선되던 해, 그는 어머니를 잃었다. 그리고 1969년 결혼과 동시에 가장이 되어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또 좋은 작품을 쓸 자신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1970년 학생들 수험서인 『진학』이라는 잡지를 발행하는 출판사에 취직했다. 순전히 먹고살기 위해서였다. 조세희는 이런 이유들로 인해 문학에서 멀어져갔다.
직장생활을 하던 조세희가 문학에 다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73년 무렵이었다. “한 작가로서, 아니 한 시민으로서 주어진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 조세희는 1974년 10년간 놓았던 펜을 다시 잡았다. 그가 경험한 빈곤층의 핍박받는 생활이 그를 다시 문학의 길로 인도한 것이다.
“내가 제일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악이 내놓고 선을 가장하는 것이었다. 악이 자선이 되고 희망이 되고 진실이 되고 , 또 정의가 되었다. 내가 개인적으로 선택의 중요성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이 무렵이었다. 어느 날 나는 재개발 지역 동네에 가 당장 거리에 나앉아야 되는 세입자 가족들과 그 집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때 철거반이 철퇴로 대문과 시멘트 담을 쳐부수며 들어왔다. 나는 그들과 싸우고 돌아오다 작은 노트 한 권을 사 주머니에 넣었다.”
그 작은 노트에 글을 쓰며 그는 다시 펜을 쥐었고 1975년 말에 『문학사상』에 단편 「칼날」을 연재하며 『난쏘공』을 시작했다.
『난쏘공』의 문장은 짧다. 『한겨레』의 문학 전문기자 최재봉은 이를 두고 조세희의 트레이드마크인 “스타카토식 단문”이라고 평한다. 그런 단문이 나오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당시 조세희는 출판사에 다니며 틈틈이 다방에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1976년 『학생중앙』으로 직장을 옮긴 후에는 근처에 있던 서소문공원에서 소설을 써나갔다. 틈틈이 나는 시간이라 조세희는 항상 시간에 쫓겨야 했고 회사의 눈치를 봐야 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조세희의 문체는 점점 단문이 되어갔다. 『난쏘공』의 스타카토식 딱딱 끊어지는 문체는 모두 조세희의 소설 창작 여건 때문이었다. 또한 조세희는 당국의 검열을 무사통과해야 했다. 자신이 일궈낸 창작물이 온전히 전해져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때문에 조세희는 『난쏘공』을 동화처럼, 현실과는 한발 떨어진 꿈처럼 써나갔다. 즉, 사실을 그리되 그 형식과 문체에서 동화적인 냄새를 풍긴 것이다. 서울시 낙원구 행복동이라는 가상의 공간을 만들고 일반인들과는 달리 사회의 약자로 취급받는 난쟁이, 꼽추 등을 등장시킨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난쏘공』의 단문은 아무래도 1970년대적 상황의 산물이라 해야 할 것이다. 직설이 아닌 은유와 상징을 강요했던 정치적 상황, 그리고 직장생활을 하느라 긴 문장을 생각해 쓸 수 없었던 개인적 사정이 겹쳐서 나온 것이었다. 단문을 쓰고자 하는 내적인 요구도 있었다.”
‘내적인 요구’는 조세희가 영향을 받은 소설들에서 기인한 것이다.
“습작 시절 내게 영향을 준 작가는 사르트르를 비롯한 참여파들이었지만, 스타일이랄까 형식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았다. 헤밍웨이의 하드보일드 스타일, 독일의 볼프강 보르헤르트나 하인리히 뵐과 같은 전후문학의 짧은 문장들, 영화로 치면 흑백영화 같은, 전쟁의 상처를 빼어나게 그린 것들, 또 포크너의 의식의 흐름과 카프카 소설의 독특한 분위기 역시 영향을 주었다.”
『난쏘공』의 공간적 배경은 빈민과 공장 노동자들이 살고 있는 산동네 철거촌이다. 실제 그는 서울시 종로구 무악동, 동대문구 면목동, 구로구 가리봉동, 인천 동구 만석동 일대를 취재해 글을 썼다. 면목동에서는 셋방살이를 하기도 했다. 그의 이런 경험과 취재는 소설 『난쏘공』에 오롯이 녹아 있다. 빈민과 공장 노동자의 삶이 녹아 있는 『난쏘공』은 비슷한 시기에 출간된 황석영의 『객지』와 함께 1970년대의 대표적인 노동소설로 평가된다.
이 두 소설은 당시로선 금기시되던 경제성장의 어두운 면, 즉 극빈층의 생활상을 여실히 보여줬다. 떠돌이 노무자의 삶을 보여준 『객지』와 철거된 산동네에서 생활하던 난쟁이를 등장시킨 『난쏘공』은 경제성장의 그늘 아래서 신음하던 이들을 대변했다. 전태일의 분신자살 사건을 목도하고 충격을 받아 『객지』를 썼다는 황석영과, 철거촌의 마지막 식사를 침범한 포크레인을 본 뒤 『난쏘공』을 쓰게 된 조세희는 닮지 않은 듯 닮아 있었고, 또 닮은 듯 닮지 않은 모습을 보여줬다.
그에게 『난쏘공』은 피맺힌 절규였다. 그는 낯선 형식 안에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는 1970년대 상황을 『난쏘공』에 담아냈다.
“사람이 태어나서 누구나 한번 피 마르게 아파서 소리 지르는 때가 있어요. 그 진실한 절규를 모은 게 역사라고 나는 봅니다. 『난쏘공』은 내가 너무 아파서 지른 간절하고 피맺힌 절규였어요. 그래서 아마 20년이 흘러도 그 난쟁이들의 소리에 젊은이들이 귀를 기울이는 걸 겁니다. 시대 문제의 핵심, 인간의 마음에 가까이 갔었기 때문에.”
조세희는 『난쏘공』 이후 침묵하다 1983년 『시간여행』을 내놓는다. 그리고 1985년에는 사진산문집인 『침묵의 뿌리』를 내놓았다. 1979년 사북사태의 연장선상에서 1984년과 1985년에 사북을 세 차례 방문해 100여 장의 사진을 찍어 내놓은 산문집인 『침묵의 뿌리』는 “긴급하다는 한 가지 생각” 때문에 출간된 것이었다. “나는 작가로서가 아니라 이 땅에 사는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그 동안 우리가 지어온 죄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는 그의 말처럼 조세희는 『침묵의 뿌리』를 우리가 지어온 죄에 대한 기록으로 남겼다.
변하지 않았지만 변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1970∼1980년대를 역사로 인식하는 사람들, 그는 이런 생각을 하는 이들에게 경각심을 주고 싶었다. 아직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었다. 이 같은 조세희의 생각은 『당대비평』 창간호에 실린 「무산된 꿈, 희망의 복원」이라는 글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이것을 보면 『당대비평』이 지향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째서 조세희가 『당대비평』을 창간하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이 글에서 조세희는 한국 자본주의에 메스를 들이댄다. 그는 한국을 “물론 경제강국도 아니고 선진국도 아니며, 넙죽넙죽 빌어다 쓴 외채가 하늘에 닿을 정도로 많아 해마다 피땀이 밴 수십억 달러, 가슴이 미어지는 백억 달러 안팎을 원통하게도 국내의 눈물과 한숨 어린 긴급한 문제들에 못 쓰고 자본과 기술의 ‘본국’들인 선진세계에 고스란히 이자로 바쳐야 되는, 분수 모르고 설치기만 하는 만년 허풍선이 개발도상국”이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이 나라 한국은 “경제 위기의 원인을 노동자 고임금에서 먼저 찾으며 노동법을 개악하고 재개악하려는” 나라, “소수의 낙원”이 된 나라라고 규정하고 “우리처럼 숨막히고 슬픈 모순의 나라는 아무리 눈 씻고 보아도 찾을 수가 없다”로 말한다. 그가 바라보는 한국이라는 나라는 북한과 남한 모두 실패한, 그래서 절망적인 상태에 빠져 있는 나라다. 그는 이 절망을 희망으로 돌리려 『당대비평』을 창간했다.
문학평론가 권성우는 “조세희 선생님처럼 한 작품에 문학적 염결성과 진정성을 몽땅 쏟아 부은 작가도 흔치 않다”며 “『난쏘공』 30년의 발자취는 한 시대의 정치·사회적 핵심과 대결한 작가 정신의 산 증거”라고 평했다. 이런 평가를 받는 조세희에게 문학이란 어떤 의미일까? 『난쏘공』이 피맺힌 절규였다는 점에서, 비록 소설은 아니지만 『침묵의 뿌리』가 역사에 대한 기록이라는 점에서 조세희가 갖고 있는 문학관을 조금은 짐작할 수 있겠다. 그런 그에게, 현실을 버리고 과거로 가는 문학이나 현실과 맞대면할 힘을 잃어버린 문학은 용납하기 힘든 것이었을 터이다.
자본주의에 대해 끊임없이 비판의 칼날을 들이대고, 노동자, 빈민, 그리고 이 세상의 난쟁이들에게 여전히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는 그는, “온전한 항아리” 같은 세상을 원한다. 그의 말로 이 글, 마무리 짓자.
“전래동화 한 편을 기억할 것이다. 팥쥐 엄마가 콩쥐에게 물 항아리 하나를 주면서 돌아올 때까지 채워놓지 않으면 벌을 주겠다고 한다. 콩쥐는 열심히 물을 길어 부었지만 항아리를 채울 수 없었다. 밑이 빠졌던 것이다. 우리 땅에도 도덕과 질서를 채우는 항아리가 하나 있다. 내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이 항아리는 한 번도 채워진 적이 없다. 군부·정치인·재벌·관료들이 저마다 빨대를 들이대고 무엇이 채워지는 족족 빨아먹었기 때문이다. 나는 무엇이든 담으면 차곡차곡 쌓이는 온전한 항아리를 보고 싶다.”]
아래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출간 3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낭독회에서 가진 인터뷰 내용 중 일부입니다.
[질문 : 작가 입장에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독자로부터 30년 동안 지속적으로 사랑을 받은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조세희 : 30년 동안 100만 부 나갔다고 하니 1년이면 3만 부입니다. 요새 작가들이 3개월 만에 100만 부 나가는 걸 쓰던데, 그에 비하면 그렇게 많은 부수는 아니고, 자랑할 것도 없죠. 물론 내가 문학을 시작할 시절에는 이렇게 책이 많이 팔리지 않았습니다. 그런 걸 보면 꽤 나간 편이긴 합니다. 포크너는 자신의 책 4만 부가 나가니까 야단이었죠. 그러니 1년 평균 3만 부면 대단한 것입니다. 1만 부면 그 사회에서 읽을 만한 사람 다 읽은 것이니까요. 하지만 솔직히 제 소설이 독자들에게 엄청나게 사랑받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 소설에 대해 증오에 찬 목소리를 듣기도 했고요. 제 집에도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1쇄가 없습니다. 몇 년 전 집회 현장에서 사진을 찍다가 만난 여학생이 사인을 해달라며 1쇄를 갖고 왔더군요. 제가 다른 책 여러 권하고 바꾸자고 했더니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얘기를 들어보니 아버지가 대학생 때 어머니한테 선물로 책을 줬고, 그 책이 인연이 돼 결혼을 하고 자신이 태어났다고 하더군요.
질문 : 이 소설은 철저한 현장 탐사를 바탕으로 한 리얼리즘 소설이자 사회에 대한 문학의 윤리적 책임을 다한 소설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 소설을 쓰게 된 동기는 무엇입니까?
조세희 : 글을 쓰는 것만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정말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글을 썼고 그 작품이 바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입니다... 사실 이 책을 쓸 때만 해도 30년 이상 읽힐 거라고 생각을 못했습니다. 더구나 학생들이 시험을 치르기 위해 사서 보는 것도 상상 못했죠. 그저 쓸 당시에 '지금의 세상이 계속되면 내 미래, 손자들의 미래도 아름다울 수 없겠구나'라고 생각하고 썼던 것입니다. 그 사이 30년이 흘렀군요.
질문 : 건강이 좋지 않으시다는 이야길 들었습니다. 어떠신지요?
조세희 : 건강이 별로 좋지 않아요. 오늘 질문을 예상하고 미리 좀 적어왔는데, 돋보기를 써도 잘 보이지가 않네요. 제가 젊었을 때 좀 철부지였죠. 서양의 환경문제도 좀 일찍 접하고 무정부주의 영향도 많이 받아서 '이 지구를 위해 딱 60년만 살다 가자'라고 생각했었죠. 당시에는 우리나라 민주주의에 회의가 많아 60세까지만 살자고 했지만 어쩌다보니 예순을 넘기고 말았네요. 사실 술은 전혀 못했는데 담배는 하루에 3갑씩 피웠습니다. 그러면서 멀쩡하기를 바라면 말도 안 되죠. 현재 제 적(敵)은 병도 아니고 이데올로기도 아닙니다. 제가 가진 가장 큰 적은 글을 쓰려는 '의지'를 막는 것들이죠. 종합병원에 가니 심장, 폐 분야별로 여러 명의 의사가 돌봐주더군요. 사실 오늘 이 자리를 나오기 위해 최근 더 많이 먹고 몸도 만들고 그랬습니다. 이 죽일 놈의 기억력보다 더 오래 살아남기 위해 악착같이 버텨야겠습니다. 나를 치료해주는 의사 한 분은 제가 작년에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서 "죽는 게 무서운 게 아니라 내 계획이 있는데 이걸 못할까 두렵다"고 했더니 몇 달 뒤 좋은 소식을 주셨습니다. 그는 "선생님, 일 하십시오"라고 하더군요.
질문 : 시위현장을 다니는 것으로 유명한데 요즘도 현장에 취재를 나가시는지요?
조세희 : 제가 사진전문가는 아니지만 기록을 남긴다는 점에서 사진과 소설은 같습니다. 사실 시위현장에서 사진을 찍는 일은 저 같은 늙은이에게 굉장히 위험한 일입니다. 언젠가 시위현장에서 사진을 찍다 죽을 뻔한 일도 있었지요. 지하철 9호선 공사장 낭떠러지에 떨어질 뻔했는데, 젊은 전경 둘이서 철망에 걸린 절 구해줬어요. 가끔 10여 년 전 현장서 찍은 사진 달라고 하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잘 찍어서가 아니라 지나간 시간이 그 안에 있기 때문이겠죠. 그래서 사진은 슬픈 예술입니다. 내가 현장에 나가는 것은 머릿수를 하나 채우는 일이기도 합니다. 시위현장을 지나면서 다소 불편하더라도 시위자들을 욕하지 마십시오. 시위를 하는 사람들도 그 나름대로 절박한 이유가 있는 겁니다. 사람들이 제게 침묵한다고 하지만 전 현장에서의 지독한 상황을 보고나면 끙끙 앓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집회 현장에 못 나갑니다. 2005년 11월 농민 정영품 씨와 오추옥 씨가 자살한 이후부터는 나가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최근 민주주의가 왔다고 하는데, 착각이라고 생각해요. 전 후배들이 잘 해주길 바랍니다. 저는 그 현장을 거쳐 가는 마지막 작가가 됐으면 합니다.
질문 : '80년 광주'의 기록을 다룬 첫 장편 『하얀 저고리』는 언제쯤 마무리 돼 독자들과 만날 수 있을까요?
조세희 : 난 문단에 아는 친구도 없고, 교류도 없습니다. 행사 같은데서 악수하고 돌아서는 것 좋아하지 않죠. 난 어딜 나가 설치지 못합니다. 꼭 필요한데만 나가는 편이죠. TV 같은 곳에서 귀찮게 하면 저 조세희에 대해 대신 이야기하는 여기 권성우 교수를 만나서 의논합니다. 그러던 차에 권 교수가 『하얀 저고리』 끝내고 헌정문집도 내자고 하더군요. 그것이 『침묵과 사랑』이 됐습니다. 하지만 또 하나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될 『하얀 저고리』는 미처 못 냈습니다. 내가 건강해지면 다시 내기로 후배와 약속했습니다. 병 걸리고 의식 잃고 하다 보니 죽는 것이 무섭더군요. 그렇지만 진짜 힘든 건 좋은 작품을 쓰는 거예요. 내가 이 세상에 살았다는 흔적이니까요. 『하얀 저고리』는 어떻게든 살아 있는 동안 쓸 것입니다.
질문 : 젊은 시절 문학의 길을 선택한 이유가 있습니까? 또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출간 당시 시대상황으로 봐서 탄압이 있었을 법도 한데, 그렇지 않았던 이유도 말씀해주세요.
조세희 : 생각 없이 살다보면 세상에 길들여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항상 깨어있어야 하죠. 전 4.19 때 현장 한복판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고 피를 흘리는 것을 목격한 사람입니다. 그것이 평생 지워지지 않더군요. 도저히 그냥 있을 수 없었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글을 쓰는 것뿐이었습니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필화사건에 휘말리지 않은 것은 어찌 보면 행운입니다. 정권으로선 엮어 넣을 시기를 놓친 것입니다. 그 사람들도 아리아리했던 모양입니다. 치안본부·중앙정보부는 다 넘어갔는데, 중앙청에서 판금시키라고 올린 사람이 있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그때는 벌써 이 책이 알려질 대로 알려진 상태였습니다. 게다가 운동권에서 “이건 리얼리즘 소설로선 한계가 많은 작품이고, 오히려 정권에 도움을 준다”고 공격하기까지 했습니다. 작품해설을 쓴 김병익 씨도 행동을 조심하는 분이고 나도 얌전히 있었고요.
사회자(권성우) : 이 시대 문학은 사회와 역사에 대한 책무가 있습니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그러한 시대적 책무를 짊어진 책입니다. 또한 조세희 선생의 존재는 이 시대 문학의 한계에 대한 비판이기도 한 것입니다. 오늘 행사를 마칩니다. 조세희 선생님과 자리를 빛내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조세희 :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는 모든 사람들을 향해) 아! 잠깐만 시간을 주세요. 마지막으로 짧게 몇 마디만 하겠습니다. 절대 절망에 빠지지 마십시오. 절대 냉소주의에 빠지지 마십시오. 후배 여러분들이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을 피하지 마십시오. 현대 사회에서 모든 자본들은 사람들에게 바보가 되라고 강요합니다. 냉소주의는 사람의 기운을 빼앗아 갑니다. 절대 절망에 빠지지 마십시오. 희망을 가지고 사십시오. 전 여러분 세대에 많은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싸우지 않는다면 죽어서 지하에 있다가도 제가 싸우러 나올 것이다. 그런 일이 없길 바랍니다. 저는 여러분, 또 이후의 세대가 잘 되는 것을 진심으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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