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식 (1501-1572, 경남 합천)
아래는 김경식 시인의 글이다.
[ 산청(山淸)은 "산이 맑은 동네"란 뜻이다. 지리산의 동쪽 기슭이기 때문에 연유된 이름일 것이다.
산청은 지리산 천왕봉이 있는 고을이다. 지리산 천왕봉은 한라산 다음으로 남한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다. 산청군 중산리 산 208번지의 주소를 가지고 있다.
국립공원1호인 지리산은 경남 산청군, 하동군, 함양군, 전북 남원시, 전남 구례군에 걸쳐 있는 광활한 산이다. 지리산은 산청군이나 구례군에만 속해 있다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이 두 지역이 등산을 시작하거나 끝나는 곳이기 때문이다.
지리산은 천왕봉에서 노고단까지 이어지는 봉우리들을 넘어서 걸으며, 주능선을 따라가면 지리산이 얼마나 장엄한 산인지 알게 된다.
산청의 역사는 아득하다. 가야의 왕인 구형왕이 금서면 왕산(923m) 기슭에 돌무덤으로 묻혀 있으니 산청의 오랜 역사를 굽어 볼 수 있다. 그는 가락국의 제10대 왕이며, 구해왕(仇亥王)이라고도 한다. 김유신(金庾信)의 증조부이다. 532년(신라 법흥왕 19) 신라에 항복하여 상등(上等)의 벼슬과 가락국을 식읍(食邑)으로 받았다.
고려시대에는 삼우당 문익점 선생이 우리 땅에 최초로 목화씨를 뿌려 추위에 떨던 백성들에게 따듯한 겨울을 나게 한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실천 학문을 중시한 남명 조식 선생이 덕산에 산천재를 짓고 제자를 길러낸 곳이다.
최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고서가 있다. 허준의 동의보감이다. 허준의 스승인 유의태 선생의 고향이 이곳 산청에 있으니 이런 인연들은 모두 지리산과 관련이 있다. 재독 음악가 윤이상 선생의 고향도 산청이다. 그의 고향은 천왕봉이 바라보이는 곳이라고 하지만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결국 그의 고향은 산천재 근방 2km 지역이라고 볼 수 있다. 덕산 근방이 될 것이다. 그의 생가터를 이곳에 오면 찾을 수 있다는 것을 단념하고 말았다. 정확하게 그 위치를 확인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산청 답사의 의미는 이곳이 남명 선생의 유적이 산재해 있기 때문이다. 이번 답사는 특별히 남명 조식 선생의 삶과 문학을 찾아 떠나고 싶다.
가는 길에는 자본의 논리를 버리고 그저 무소유를 가지고 감동을 주었던 사람의 삶도 만날 수 있다. 성철 스님이다. 남명 조식 선생의 유적을 찾아가는 길목에 있는 그의 생가를 방문하는 일은 자신의 삶도 돌아보는 일이 된다.
대전에서 통영으로 이어지는 고속도로는 소백산맥을 관통하고도 모자라 계속해서 산악지역이다.
무주와 함양을 지나고 산청IC를 지나면 아름다운 강변이 반긴다.
남강의 지류 경호강이다. 이 강변을 휘돌아 달리다 보면 단성IC가 기다린다. 미끄러지듯 이곳을 빠져 나오면 20번 국도와 만난다. 우회전하면 문익점이 중국에서 가져온 목화씨를 재배했던 ‘목면시배유지’에 닿는다. 이곳은 목화를 처음 재배하여 고려후기 의복 생활에 혁명을 가져온 것을 기념하는 장소이다. 면화의 역사를 이해 할 수 있으며, 베틀과 물레를 관람할 수 있다.
단성향교가 있는 단성은 지금은 비록 퇴락한 소읍이지만 1862년 발생한 진주민란이 일어났던 곳이다. 남명 선생 사후 300년이 지난 후지만 남명 조식의 사상적인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진주민란은 조선 후기의 삼정의 문란에 그 원인이 있다. 원인은 경상우병사 백낙신의 수탈 때문이었다. 경상우병사는 경상우도병마절도사의 준말이다. 경상우도 지역의 최고 육군사령관이다. 병마절도사는 종 2품으로 관찰사와 맞먹는 고위직이었다. 백낙신은 1861년 병마절도사에 임명된 후 진주목사 홍병원(洪秉元)과 결탁하여 부정 축재한다. 몰락한 양반 출신인 유계춘이 김수만, 이귀재 등과 함께 거사를 일으킨다. 진주지방의 백성 8만여 명이 참여하였다고 한다.
최근에 나는 유년시절에 자주 부르던 노래가사가 혁명에 참여한 농민군의 노래였다는 것을 알았다.
"이 거리 저 거리 각 거리/ 진주 남강 또 만강(滿江)/ 짝 발로 헤앙금/ 도래미 줌치 장도칼/ 구시월에 무서리/ 동지 섣달 대서리"
겨울밤이었을 것이다. 어린 시절 마실을 가서 친구들과 함께 다리를 일렬로 가지런히 놓고 다리를 손으로 툭툭 치면서 이 노래를 부르지 않았던가. 물론 어떤 의미의 노래인지는 알 수는 없었다. 노래를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이 거리 저 거리의 모든 거리 백성들아/ 진주 남강변을 채우도록 모두 모여라/ 한 쪽 발에는 데님을 메고(동지라는 신호)/ 도래미 줌치(허리춤에 차는 복주머니)속에 장도칼을 지니고,/ 구시월에 무서리처럼/ 동지 섣달 대서리처럼
진주민란의 주동자 유계춘은 처형당하고 백낙신은 유배된다. 진주 민란후 백성들을 다른 곳 보다 많이 처형하지 않은 것은 안핵사로 조정에서 파견했던 박규수(1797~1877)의 보고서가 있었기 때문이다. 박규수는 조정에 진주와 인근의 백성들이 모두 들고 일어섰다고 보고한다. 물론 관리자들의 책임이 있었음을 보고했다. 아마 박규수의 진주민란 진상보고가 삼정의 문란이 아닌 일방적인 백성들의 책임으로 몰았다면, 조정은 최소한 수 천 명의 진주 사람들을 참살하였을 것이다.
박규수는 연암 박지원의 손자이다. 1866년 셔먼호 사건 때는 평안감사였으며 경복궁 중수의 책임자였다. 그는 끝내 할아버지 박지원을 욕되게 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에 골방에서 아이들과 함께 부르던 이 노래의 의미를 생각하니 남강이 예사롭지 않게 보인다.
‘목면시배유지’에서 20번 국도를 타고 시천면 방향으로 달리다가 <성철대종사생가> 팻말을 따라 좌회전 하면 이내 큰 다리가 보인다. 이 다리를 건너면 성철 스님의 생가이다. 성철 스님 생가 가는 길은 한적하다. 제법 수량이 많은 남강이 넘실거리고 산들이 어깨동무를 하고 지리산에서부터 이어져 왔음을 알게 된다.
마침 내리던 비도 그치고 성철 스님의 생가 터를 걷는다. 이곳은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로 성철(性澈:1912~1993) 스님이 태어난 곳이다.
습기 먹은 신선한 바람이 불어준다. 성철 스님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법어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이다. 이 말뜻을 아직 나는 잘 알지 못한다. 다만 이 말은 전두환 군사독재 시절에 그가 은유적으로 표현한 법어이다.
이곳은 불자가 아닌 사람도 많이 찾아온다고 한다. 이것은 일반인들이 김수환 추기경을 존경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 아니겠는가. 그가 생전에 무소유를 실천하며 검소한 생활을 한 사실 때문이다. 그가 25년 동안 살았던 곳이기에 의미 있는 장소다. 대원사로 출가하기 전에 이집에 살았다. 아쉬운 것은 생가를 제대로 복원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생가의 웅장한 모습과 겁외사는 오히려 그의 삶에 대해서 오해를 살만하다. 이런 호사한 복원을 성철 스님은 좋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생가 터를 밟는 것과 소박한 유품들을 전시하고 있는 것이 위안이다.
유품전시관에는 백련암의 방 모습과 사용하던 의자, 책상 등을 전시하고 있다. 백련암은 그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생활했던 암자이다. 의자, 책상, 가사, 장삼, 노트, 안경, 연필, 고무신, 지팡이 등을 보니 그의 소박한 삶이 피부에 와 닿는다. 그는 이런 것까지 모두 버리고 떠났다. 자신이 말한 법어를 실천하고 소박한 삶을 살았기에 사람들은 이곳을 찾는다. 그의 삶은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도 귀감이 될 것이다. ‘겁외사’란 이름은 누군가 잘 지었다 '시간 밖에 있는 절', '시간을 초월한 절'이라는 뜻이 아닌가. 부디 다른 스님들도 본받기 바라며 불자들도 이 길을 따르길 기원해 본다.
그가 1981년 총무원장 취임식에서 한 말을 읽어보면 귀가 솔깃하다.
“천지는 나와 같은 뿌리요 만물은 나와 같은 몸입니다. 천지 사이에 만물이 많이 있지만은 나 외엔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하여 남을 도우는 것은 나를 도우는 것이며, 남을 해치는 것은 나를 해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해치고자 하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이 이치를 깊이 깨달아 나를 위하여 끝없이 남을 도웁시다.”-- 성철 스님 ‘남을 돕는 것이 곧 나를 돕는 것’ 중에서
과연 현대 불교의 선승답다. 이런 말을 할 줄 알았기에 종교의 벽을 허물었을 것이다.
칠월과 팔월에 들꽃들이 흔들리는 숲길을 걸으면 꽃향기 보다 풀냄새가 난다. 성철 스님의 생가를 나와 승용차 문을 열고 강 길을 달린다. 오래전에 맡았던 풀냄새가 난다. 간혹 배롱나무에 핀 백일홍과 능소화가 아름다운 답사 길을 만들어주고 있다. 그러나 다른 여름의 들꽃들은 신록에 가려 초라하다. 풀섶에는 간혹 망초꽃들이 해쓱한 얼굴을 내밀며, 자신들의 머리를 흔들며 인사를 하기도 한다.
아름다움 속에는 슬픔과 상처가 스멀거린다. 이 녹색의 향연 속에는 때로 늙은 농부들이 들길을 간다. 마음이 편안하고 평화롭게 보인다. 세계 경제의 한파에도 봄은 왔다가 떠나고 여름의 신록이 한창이다.
그러나 세상살이는 하루도 편안할 날이 없다. 걱정들이 태산처럼 높고 바다처럼 깊다. 다양한 핑계로 마음 문을 닫고 자신의 욕심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살아간다.
이런 시기에 경남 산청에 있는 남명 조식 선생의 유적지를 걷다보면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지리산 천왕봉을 바라보며 그가 추구했던 사상과 삶을 문학적으로 표현했던 한시를 읽어 보려고 한다. 그의 한시를 읽다보면 닫힌 마음의 문도 열게 될 것이다.
덕산으로 가는 길에는 고래 등 같은 기와집이 많은 남사마을이 있다. 남사마을은 개울물이 동네를 반달 모양으로 휘감아 돌아 나간다. 기와집 40여 채가 서로 연결된 골목이 아닌 독자적인 고샅길을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고샅길이 아름답고 고색창연하여 정부의 보조금까지 받고 있는 마을이다. “옛날 담”이란 뜻의 ‘예담촌’이다.
남사마을은 마을 북쪽의 여울물을 경계로 상사마을(단성면 시월리)과 인접해 있다. 지금은 비닐하우스 촌이 되어 버렸지만 예전에는 마을 생김새가 반달 모양이었다. 동네 사람들은 반월을 메우면 안 된다고 믿어 동네 안에는 집을 짓지 않았다고 한다.
최씨 고가 가는 고샅길은 아름답다. 이 집의 사랑채의 규모는 매우 크다. 그러나 지금 행랑채는 쓰러져 가고 있다. 짓지 않는 개 한 마리가 눈을 멀뚱거리며 앉아 있다. 담 밑에는 잡초가 무성하다.
남사마을에서 내가 주목한 집은 연일 정씨 문중의 재실인 ‘사양정사’였다. 정면 7칸 측면 3칸의 단일 건물로는 큰 집이다. 이 산골에 어떻게 이런 큰 집을 지을 수 있었는지 의구심이 갈 정도의 큰 집이다. 70년 전만 해도 부자들이 산골에 자리를 잡고 살면서 부를 과시하였다. 지금은 모두 수도권에 몰려 벌집 같은 콘크리트 속에 살면서 그 크기를 자랑하고 있다. 가련하지 않은가. 남사 마을의 끊긴 고샅길을 몇 군데 걷고 담을 기웃거리다가 떠난다.
450년 전에 남명 선생은 남사 마을 앞길을 걸어 덕산으로 향해 갔을 것이다. 그 길을 간다.
남사마을을 지나 산허리를 휘돌아 20번 국도를 따라 가다보면 오른쪽에서 흘러나오는 계곡물을 만난다. 이 계곡을 따라 시오리 올라가면 단속사지에 닿는다.
단속사는 언제 폐사가 되었는지 알 수 없다. 김일손(1464~1498), 정여창(1450~1504)과 더불어 천왕봉에 올라갔다가 함양으로 가면서 단속사에 들렸던 기록이 그의 저서 두류기행에 전한다.
“절은 폐허가 되었다. 중이 거쳐하지 않는 절간이 수백칸이다”
이미 500년 전에 황폐화 되어 가고 있던 절이 단속사였다. 당시 이 절의 규모를 알 수 있다. 지금은 이 터에 동네가 생기고 논과 밭이 차지하고 있다. 단속사에는 신라의 화가 솔거의 유마상이 있었다고 전한다. 고려시대 최고의 명필 탄연의 비가 있었는데 지금은 숙명여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단속사 3층 석탑 앞에는 돗자리 깔고 동네 할머니들이 저녁을 드시고 해맑게 웃으시는 모습이 평화롭다. 단속사 3층 쌍탑의 자태는 신라탑의 전형을 보여주는 백미이다. 쌍탑 뒤에는 정당매가 630살이 되도록 아직 살아있다.
고려 말 강회백(1357~1402)이 유년시절에 단속사에서 공부하여 과거에 급제한다. 정당문학과 대사헌이 되었지만 조선이 개국된 후에는 불교를 배척하는 일에 앞장섰으니 단속사의 폐사는 이때부터가 아닐까 한다. 650년 된 매화나무는 작고 왜소하다. 그러나 역사성에 고개가 숙여진다.
통정 강회백이 고려에서 벼슬을 하다가 조선에서도 관직에 등용된 것을 보고 남명 조식은 시 한 수를 짓는다.
‘단속사 정당매’이다.
절 부서지고 중 파리하고 산도 옛날 같지 않은데
전 왕조의 왕은 집안 단속 잘하지 못했다네.
추위에 지조 지키는 매화의 일 조물주가 그르쳤나니,
어제도 꽃을 피우고 오늘도 또 꽃을 피웠도다.
-- 남명 조식 시 ‘단속사 정당매’ 허권수 번역
고려와 조선의 왕조를 섬긴 강회백을 비판하는 시이다.
오래전부터 나는 사명당 유정(1544~1610)과 남명 조식의 만남이 이곳 단속사에서 이루어 진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석탑 앞에 마주앉은 남명과 사명당은 당시 시절을 걱정했을 것이다. 환갑을 지난 남명과 이제 갓 스물을 넘긴 사명당은 나이를 따지지 않았을 것이다. 제자들에겐 엄했던 남명이었다. 그러나 누더기 승복을 걸친, 총기 많고 눈빛 맑은 사명당이 산천재를 찾았을 때 그는 오히려 친구를 만난 것처럼 대했다. 더욱이 사명당을 위해 남명은 시 한수를 짓는다. ‘유정산인에게 주는 헌시(贈惟政山人)’이다. 산인(山人)은 중에 대한 존칭어다. 43살이나 연하에게 이런 시를 쓴 남명의 또 다른 인품을 이 시를 통해 알 수 있다.
花落槽淵石(화락조연석) 조연의 암반 위에 꽃잎 떨어지고
春深古寺臺(춘심고사대) 단속사 축대엔 봄이 깊었구나.
別詩勤記取(별시근기취) 이별시를 부지런히 기록하게
靑子政堂梅(청자정당매) 지금 정당매의 푸른 열매 맺은 것을
--남명 조식 시 贈惟政山人(증유정산인) 김경식 번역
조연(槽淵)은 단성면 입석리 단속사 아래 있는 개울이다. 이 개울 암반위에 꽃잎이 떨어지고 단속사엔 봄이 깊었다. 그러나 남명 조식은 이야기가 통하는 사명당과 이별해야 한다. 남명은 이 정서를 가지고 이 시를 썼다.
12년간 제자를 키우며 미래를 대비했던 산천재의 분위기는 스산한 그리움을 밀어내며 맑고 소박한 아름다움이 일렁인다. 산천재 입구에 작은 자연석 시비에는 남명 선생의 시 제덕산계정주( 題德山溪亭柱)라는 시가 새겨져 있다.
請看千石鍾(청간천석종) 천석같은 무거운 종을 보라
非大扣無聲 (비대구무성) 힘차게 두드리지 않으면 소리를 내지 않네
爭似頭流山(쟁사두류산) 지리산과 비교하며 경쟁하려하는가.
天鳴猶不鳴(천명유불명) 하늘이 울어도 오히려 울지 않을
-- 남명 조식의 시 ‘題德山溪亭柱’ 김경식 번역
작은 종은 두드려도 소리가 난다. 그러나 큰 종은 크게 쳐야 소리가 난다. 소인배는 조금만 유혹에 넘어가지만 대인은 어떤 유혹에 미혹되지 않음을 이 시에 담아내려고 했다. 그러나 어떤 유혹에도 지리산은 흔들리지 않기에 그는 지리산은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는다고 표현한다.
학처럼 날개를 펼쳐서 낮고 높은 산야를 품고, 하늘과 닿아 있는 천왕봉은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지리산 천왕봉에 많은 애정을 지닌 남명 선생은 뼈대 있는 민족의 주체를 확립하기 위해 제자를 키운다. 이곳이 산천재이다,
그는 이곳에서 자신의 마지막 웅지를 품었던 선비였다. 아호 남명(南冥)에서도 그 기상을 엿볼 수 있다.
"붕새가 날개를 펴서 삼천리 수면을 치고 구만리 하늘을 날아 南冥(남극)에 도달" 한다는 장자의 ‘소요유편’ 첫 장의 내용에서 따왔다. 날개를 펼치면 삼천리나 되는 새 붕새가 날고 싶은 곳이 바로 남명(南冥)이기 때문이다. 우주의 끝이 될지도 모를 南冥(남극)을 호로 정한 것에도 알 수 있듯이 그의 기상은 높고 넓었다.
산천재는 임진왜란 때 불타고 1818년에 새로 지어 오늘에 이른다. 마루 위에 있는 산천재라 쓴 현판의 글씨는 예사롭지 않다. 전서체는 조윤형의 쓴 것이며, 해서체는 이익회의 글씨이다.
현판 왼편에는 소를 몰고 가는 경작도가 그려져 있다. 현판 바로 위에는 네 명의 선비들이 바둑 두는 그림이 흐릿하다. 진시황을 피해 숨어들었던 4명의 선비를 그린 벽화이다. 오른 편에는 중국 고사의, “소유라는 사람이 요왕으로 부터 나라를 다스려 달라는 말을 듣고 거절한 후에 강가에서 귀를 씻는다. 이 말을 들은 소부(巢夫)가 더러운 물을 자신의 소가 마실까 걱정이 되어 고삐를 당겼다” 는 전설을 그린 그림이라고 한다.
그러나 벽화가 매우 낡고 헐어서 좀처럼 그림을 식별하기가 불가능하다. 이 그림을 그린 화공을 알 수 없다. 다만 1818년 전에 산천재를 복원한 후 그려진 것으로 전한다.
이곳에서 남명을 기억하는 생명체는 오직 늙은 매화나무이다. 일명 남명매 라고 부르는 이 나무는 남명이 직접 심었다고 전한다. 매화를 좋아했던 남명이 생전에 직접 심었다고 전한다. 그렇다면 수령은 대략 450년이다.
우산을 쓰고 남명 조식의 묘소를 오른다. 남명의 오랜 벗 성운이 쓴 남명의 묘비에는 "남명은 세상사를 잊지 못해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사랑하였다. 달 밝은 밤이면 홀로 앉아 슬픈 노래를 불렀다. 노래를 끝내고는 늘 눈물을 흘렸다"고 쓰여 있다. 처사였지만 현실인식을 하며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와 백성을 걱정했던 것이다.
남명은 경(敬)과 의(儀)를 강조했다. 결코 이론에 치중하지 않았다. 실천을 중시하는 학풍을 강조하였다. 이런 스승의 뜻을 따라 정인홍, 곽재우 등 남명의 제자들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으로 활약한다. 그 자신이 아끼던 경의검(敬儀劍)은 정인홍에게 물려주었다. “안을 밝히는 사람은 경이고, 행동을 결단하는 자는 의다(內明者敬, 內斷者儀)”를 강조했다, 자신의 몸가짐이 흐트러질까 방울(惺惺子)을 몸에 차고 제자들을 가르쳤다고 하니 그의 태도를 알만하지 않은가. 그의 이런 삶의 태도에 감동이 된다. 이 묘소는 440년 동안 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경치는 너무나 아름답다. 비가 오지 않았다면 경치를 더 관람할 것을 아쉽지만 내려와야 했다. 풍경이 아름다우면 상처도 깊어진다고 했던가. 묘소를 참배하고 지리산을 바라보라. 지리산에서 자유를 위해 목숨을 잃었던 사람들을 기억하면 가슴은 두근거리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싶어질 것이다. 우리의 국토는 곳곳에 자유를 위해 스러져간 사람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스며있다.
남명 조식 선생의 삶을 탐구하기 위해 기념관 관람에 나선다. 2001년은 남명 조식(曺植 1501~1572)) 선생의 탄생 500주년이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기념관 건립이 추진되었다. 2004년 7월 기념관이 완공되었다. 전시실, 영상실, 교육관, 세미나실, 유물 수장고를 갖추었다. 전시실에는 남명 조식 선생의 저작 서적, 제자들과 후손들의 인맥을 이해할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나는 오랜 시간 남명 조식 선생의 제자들에 관해 문화해설사 조종명 선생과 대화했다. 그는 남명 조식에 관해서는 전문가였다.
남명 조식 선생은 이 마을 출신이 아니다. 환갑이 넘긴 나이에 제자를 양성하기 위해 이곳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당시 환갑을 넘긴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풍수지리에도 능한 그가 마지막으로 자신의 삶의 터로 잡은 곳이니 이곳의 지맥을 알만하지 않은가.
1501년 남명 조식은 경남 합천군 삼가면 토동에서 부친 조언형과 모친 인천 이씨 사이의 3남 5녀 중 2남으로 태어났다. 이곳은 그의 외가였으며 본가는 합천군 삼가면 판현이다. 5살 때 까지 외가에서 자랐으며, 이후 부친이 장원급제 한 후에는 한양에서 살게 된다.
한양에서 소년기를 보내며 이윤경, 이준경, 이항 같은 친구들과 학문을 논하며 열심히 공부한다. 1518년 그의 나이 18세 때 부친이 함경도 단천군수로 부임하자 그곳에서 생활을 하기도 한다. 이듬해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가 죽음을 당하고 숙부 조언경이 파직당하자 벼슬하는 일이 위험함을 깨닫는다.
그러나 그는 이듬해인 1520년 사마시에 합격하다. 22세 때 김해의 남평 조씨와 결혼한다.
그의 반전된 삶은 1525년 그의 나이 25세 때 시작된다. 성리대전을 읽다가 다음과 같은 구절에 감동을 받는다. “이윤(伊尹)이 뜻한 바를 의미하고 안연(顔淵)이 배운 바를 습득하니, 벼슬에 나아가면 성취하는 일이 있어야 하고 산림에 처해서는 지키는 바가 있어야 한다. 사내대장부는 당연히 이와 같이 행해야 하니 , 벼슬살이에도 이루는 일이 없고 산림에 처해서도 지키는 바가 없다면 뜻한 바와 배운 바를 장차 무엇에 쓰겠는가”라는 구절을 읽고 크게 깨닫는다. 이윤(伊尹)은 중국 은나라의 전설상의 인물이다. 유명한 재상으로 탕왕을 보필하며, 하나라의 걸왕을 멸망시키고 선정을 베풀었던 사람이다. 안연(顔淵(B.C.521~B.C.490))은 중국 춘추 시대의 유학자이다. 공자의 수제자로 학덕이 뛰어났던 사람이다.
이후 그는 공자와 도가사상(道家思想)의 영향을 받고 새로운 유교이론을 창시한 주돈이(1017~1073), 중국 북송 때의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을 주장한 정명도(1032~1085), 중국 송대의 유학자이며 주자학 집대성 한 주자(1130~1200)의 화상을 직접 그려서 병풍으로 제작하여 책상 앞에 두고 공부했다.
1526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고향 합천에서 장사 지내고 3년간 시묘살이를 하고 직접 묘갈명을 짓는다. 1530년 한양 생활을 청산하고 김해로 이사한 후 산해정을 짓고 독서에 정진한다.
1537년 자신의 모친에게 과거에 응시하지 않는다는 것을 허락받고 제자를 가르치기 시작한다. 다음해 회재 이언적의 천거로 헌릉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거절한다.
1545년 을사사화가 일어나 이림(?~1546), 곽순(1502~1545), 같은 절친한 친구들이 화를 당한다. 아마도 이 무렵 그는 선비들의 죽음에 관해 이해할 수 없는 분노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훗날 그는 시 한편을 쓴다. “우연히 읊다.” 라는 우음(偶吟)이란 시다.
人之愛正士 (인지애정사) 사람들이 곧은 선비를 존경하는 것이
好虎皮相似(호호피상사) 호랑이 가죽을 좋아함과 유사 하네.
生前欲殺之(생전욕살지) 살았을 때에는 죽이려고 하다가
死後方稱美(사후방칭미) 죽은 후에는 미덕으로 칭찬하네.
-- 남명 조식 한시 우음(偶吟) 김경식 번역
1553년 그의 나이 53세에 대사성으로 있던 퇴계 이황이 관직을 가질 것을 권유하였지만 끝내 거절한다. 죽는 날까지 처사로 남기를 원했다.
“왕비로 출가시킨 문중보다 대제학을 배출한 집안이 낫고, 대제학을 배출한 문중보다 문묘 배향자를 키운 집안이 낫다. 문묘 배향자 보다는 처사를 배출한 집안이 최고다”라는 말은 당시 선비들이 모두 알고 있던 말이다. 그만큼 처사가 되기는 쉽지 않았다.
퇴계는 평생에 처사가 되기를 희망하여 영정에도 처사로 써줄 것을 부탁한다. 그러나 결코 퇴계는 처사라고 볼 수 없다. 남명 조식이 진짜 처사일 것이다.
그는 1555년 단성현감에 제수되었지만 취임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를 사직하는 유명한 을묘사직소(단성소)를 올린다. 이 글은 지금 읽어도 간담이 서늘하다.
“전하의 국사(國事)가 이미 잘못되고 나라의 근본이 이미 망하여 천의(天意)가 이미 떠나갔고 인심도 이미 떠났습니다. 비유하자면 마치 1백년 된 큰나무에 벌레가 속을 갉아먹어 진액이 다 말랐는데 회오리바람과 사나운 비가 언제 닥쳐올지를 전혀 모르는 것과 같이 된 지가 이미 오래입니다. 조정에 있는 사람 중에 충의(忠義)로운 선비와 근면한 양신(良臣)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 형세가 이미 극도에 달하여 미칠 수 없으므로 사방을 돌아보아도 손을 쓸 곳이 없음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소관(小官)은 아래에서 히히덕거리면서 주색(酒色)이나 즐기고, 대관(大官)은 위에서 어물거리면서 오직 재물만을 불립니다. 백성들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으며, 내신(內臣)은 후원하는 세력을 심어서 용(龍)을 못에 끌어들이듯이 하고, 외신(外臣)은 백성의 재물을 긁어들여 이리가 들판에서 날뛰듯이 하면서도, 가죽이 다 해지면 털도 붙어 있을 데가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신은 이 때문에 깊이 생각하고 길게 탄식하며 낮에 하늘을 우러러본 것이 한두 번이 아니며, 한탄하고 아픈 마음을 억누르며 밤에 멍하니 천정을 쳐다본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자전(慈殿)께서는 생각이 깊으시지만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寡婦)에 지나지 않으시고, 전하께서는 어리시어 단지 선왕(先王)의 한낱 외로운 후사(後嗣)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천백(千百) 가지의 천재(天災)와 억만(億萬) 갈래의 인심(人心)을 무엇으로 감당해 내며 무엇으로 수습하겠습니까?”
--- 남명 조식선생 ‘ 단성 상소문’ 부분 인용
특히 “대비께서는 사려가 깊으시나 깊은 궁궐 속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고, 전하께서는 어리시어 선왕의 대를 잇는 외로운 아드님에 지나지 않습니다”라는 상소문 내용에 조정은 큰 파문으로 일렁거렸다. 대비는 명종의 어머니로 수렴청정을 하던 문정왕후가 아니던가. 명종은 화가 나서 남명 조식에게 벌을 주려고 하였지만 신하들이 반대했다. 이런 반대는 목숨을 내놓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었다. 때로 나약해 보이다가도 조선 선비들이 대단해 보일 때는 이런 때이다.
이 상소문으로 인해 남명 조식의 명성은 대단했다. 백성들은 그의 인품에 대해서 태산같이 높고 크다 (泰山僑岳), 서릿발처럼 차갑고 뙤약볕처럼 뜨겁다(秋霜烈日)같은 말을 하면서 그를 추앙한다.
1558년 그는 진주목사 김홍, 황강 이희안, 이공량, 구암 이정 등과 함께 지리산을 등반하고 <유두류록>을 짓는다. 아마 이때 지리산 덕천동으로 이주할 계획을 세웠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2년 후에 지리산 덕천동으로 이주하여 산천재를 짓고 강학하였기 때문이다.
내가 처음 산천재와 남명 선생의 묘소를 찾았던 해는 1981년 5월이었다. 진주에서 덕산으로 오던 봄 풍경은 아름다웠다. 시간이 세월이 되어 어느덧 28년이 흘러갔다.
지리산에서 흘러온 물들이 서로 만나는 곳이 덕산이다. 이곳에서 강을 이루고 마을을 휘돌아 흘러간다. 시천면사무소가 있는 유서 깊은 마을 덕산골목에는 내 청년 시대의 방황이 묻어 있다.
450년 전 남명 조식 선생은 이곳에 살터를 잡으며 유명한 한시 한 편을 남겼다. 산천재 기둥에 써 있던 그의 시를 읽던 날이 세월이 되었다. 다시 이 시를 접하니 감회가 새롭다. ‘덕산에 살 집터를 잡으며’ 란 뜻을 가진 ‘덕산복거’란 제목의 한시이다.
德山卜居 (덕산복거)
春山底處無芳草 (춘산저처무방초) 봄 산 어디든 향기로운 꽃이 없으랴
只愛天王近帝居 (지애천왕근제거) 단지 하늘에 가까운 천왕봉이 그리워서라네.
白手歸來何物食 (백수귀래하물식) 맨 손으로 돌아왔으니 무엇을 먹고 살 것인가.
銀河十里喫有餘 (은하십리끽유여) 은하수 같은 강물이 십리라 마시고도 남겠네.
-- 남명 조식 한시 <덕산복거> 김경식 번역
지리산 천왕봉을 바라보는 덕산 사륜동에 산천재(山川齊)를 짓기 전에 아마도 이 시를 지었을 것이다. 山川은 주역 대축괘(大蓄卦)의 상징이다. 여기에서 ‘대축’이란 선현들의 말씀과 행실을 많이 배워 그 은공을 비축한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남명 조식 선생은 이런 생각을 한시도 잊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만년 11년을 조선 선비의 최고의 모범을 보여줄 수 있었다. 산천재로 찾아와 남명 조식 문하에서 배운 제자들은 선조 때에 바로 정치와 학문의 주역들이 되었다. 무엇보다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장이 되어 왜적에 대항한 절의지사(節義之士)들이 되어 나라에 보은했다.
내가 문학기행을 시작한지 어언 25년이 되었다. 작가의 작품을 읽고 나면 궁금한 것은 왜 이 작가는 이런 작품을 썼는지가 궁금했다. 결국 찾아 나선 것이 작가의 고향이었다. 그러나 그 고향에서는 오히려 작가를 아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오해를 받기도 했다. 그 작가가 월북을 했으면 사상적으로 의심을 받기도 했다. 때로 조사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이 길을 포기하지 않고 왔다. “혼자 걸으면 길이고. 여럿이 걸으면 역사”라고 했던가. 지금은 많은 이들이 이 길에 동참하고 있다. 역사가 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문학기행 이전에는 역사기행을 했다. 1981년 5월에 진주에서 버스를 타고 왔던 곳이 이곳 덕산이었다. 버스정류장의 위치는 아직도 그 자리 인 듯하다. 28년이 흘러갔다.
그때 산천재를 찾아 남명 조식 선생의 삶을 이해하였지만 내가 알았던 시는 이 시조 한 수밖에 없었다. 이 시조가 중산리 국립공원입구에 시비로 서 있다.
頭流山(두류산) 兩端水(양단수)를 예 듣고 이제 보니
桃花(도화) 뜬 맑은 물에 山影(산영)조차 잠겼어라
아희야 武陵(무릉)이 어디뇨 나는 옌가 하노라
--남명 조식 시조 <두류산 양단수>
이 시조에서 두류산(頭流山) 양단수(兩端水)는 지금의 덕천서원 앞의 두 계곡이 합류하는 곳이다. 지리산 중산리계곡에서 흘러온 신천(新川)과 대원사계곡과 장당계곡이 합한 삼장천(三壯川)이 이곳에서 만나 덕천강(德川江)이 된다.
두 계곡에서 흘러온 개울의 끝이 만나기 때문에 양단(兩端)이라 하였다. 또 두 여울이 못(潭)을 만들어 합해져 양당(兩塘)이다. 그래서 이 시조에서는 '두류산 양단수'라 하고, 간혹 '두류산 양당수'라 칭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 시조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장소를 탐방하지 않고는 이해하기 어렵다.
남명 조식 선생은 이곳을 흘러들다가 만나는 두류산 양단수에 복숭아꽃이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한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맑은 물에 산 그림자가 잠겨 있다. 그는 탄성을 자아내며 무릉도원이 바로 이곳이라고 소리친다. 430년 전 환갑을 지낸 한 노인의 이런 모습을 상상하니 아직도 그 감흥이 그대로 전해오는 듯하다.
시조에서 두류산 양단수의 현 위치는 산청군 시천면사무소 소재지 마을 앞을 흐르는 강이다. 덕산(德山)이다. 덕산은 지난 70년대 말까지는 동부 지리산의 시외버스의 종점이었다. 당시는 동부 지리산 산행을 이곳에서부터 시작했으니 많이도 걷고 또 걸어야 했다.
시천은 지리산으로 번성했던 동네이다. 동부 지리산을 등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곳을 통과해야 했으며, 당연히 토산물 집산지로 번성을 이루었다. 곳감이 유명한 이곳은 오래전 보다 달리진 것은 별로 없는 듯하다. 다만 상점의 원색적인 간판들이 더 커지고 노인들이 많다는 것은 당시와 달라진 모습이다.
당시 내게 지리산은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는 산이었다. 공자는 ‘요산요수(樂山樂水)’라는 말로 동양의 자연관을 함축했다. 공자는 논어에서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착한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 지혜로운 자는 활동적이고 착한사람은 정적이며, 현명한 사람은 낙천적이고 어진사람은 장수한다.”고 했다.
옛사람들이 등산을 한 이유는 이런 동양의 자연관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자연을 탐방하며 사색하고, 산수의 덕을 배우고 실천하려는 의식은 산을 정복하려고 한 서양과는 차원이 다르다.
공자는 중국 산동의 태산에 올라 천하가 작다는 것을 인식하였으며, 맹자는 산에 오르면서 ‘높은 산을 오를 때는 반드시 낮은 데로부터 시작한다’는 자연의 상식적인 진리를 알게 되었다.
우리나라 선인들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현대인들처럼 건강을 위해 올라가지 않았다. 수양을 하며 자신을 반성하고 모순된 사회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하기 위해 산에 올랐다. ‘산과 물, 인간과 세상을 (看山看水 看人看世)’ 보기 위해 산에 올랐다. 이런 선비들이 올랐던 산들은 다음과 같다.
금강산, 지리산, 삼각산, 묘향산, 소백산, 백두산 등이다.
지리산은 영남과 호남 선비들에게는 등산이지만 답사처였다. 옛날에는 지리산을 두류산(頭流山)이라 불러왔다. 언제부터 지리산이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두류산(頭流山)은 ‘백두산에서 흘러내린 산’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산중에 금강산, 한라산과 함께 삼신산의 하나가 지리산이다.
지리산을 등산하고 산행기를 남긴 조선 최초의 학자는 김종직이다. 영남 사림의 정신적인 지주였던 그가 함양군수로 근무할 때 지리산 정상 천왕봉에 오른다. 이후 그의 제자들인 남효온, 김일손, 정여창 스승 김종직의 뒤를 이어 지리산에 오른다. 김일손은 지리산에 오르기 위해 진주목사에 자원했다는 이야기가 전할 정도로 지리산을 사랑했다. 유몽인의 지리산 찬탄은 지금도 회자된다. 그는 지리산이 가장 최고의 산이라고 극찬하였으며 은거하기에는 최상이라고 했다. 그러나 지리산을 누가 가장 많이 등산했느냐고 묻는다면 당연이 남명 조식이다. 12회를 등반했기 때문이다. 덕산동에서 지리산을 등반한 것이 3번이다. 결국 그가 마지막으로 거처를 정한 곳도 덕산동이 된 것은 그의 답사의 결과였을 것이다.
산천재를 지을 장소를 물색하고 찾아낸 것은 그의 이런 답사 경험에서 나왔을 것이다. 작가는 문학작품 어딘가에 자신의 고향 및 그 언저리의 자연과 사람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그러나 그가 태어난 장소에 이미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곳도 있었다. 작가 자신의 당대에 조차 이런 저런 이유로 자신이 태어난 생가만이라도 보존되면 다행이었기 때문이다. 문학기행은 역사기행과 달리 때로는 실체가 없는 장소를 탐방하기도 한다. 단지 문학 작품속의 작품 혹은 시 몇 편에 의지하여 작가를 알기 위해 떠나는 여행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작가가 태어나거나 문학작품속의 무대인 골목길, 산길, 들길을 걸어 보시라. 소설의 주인공이 살아서 돌아와 함께 할 것이며 주변의 자연 환경이 작품과 일치할 때 큰 감흥을 받게 된다. 혹 폐허화된 작가의 망가져 버려진 작가의 생가도 보게 될 것이며, 무덤을 찾아가 비문을 읽고 나면 작가의 생애가 가슴에 오래도록 남게 된다.
문학기행의 의미는 무엇보다도 떠날 때는 흐릿하던 한 작가의 생애와 작품들이, 돌아 올 때는 또렷한 기억으로 영원히 남겨지게 된다. 또한 작가의 작품무대나 고향언저리의 역사유적과 연계하고 그 지역의 명소에서 식사를 하는 일은 문학기행의 부대적인 추억이 될 수 있다. 문학기행이 일반적인 여행하고 뚜렷하게 구별되는 것은 지적탐구에 있다. 이는 단지 문학에 국한된 일이 아니고 이 땅의 지리와 역사적인 지식을 얻게 된다.
하루나 이틀을 집중적으로 한 두 작가에 관해 관심을 갖게 되기 때문에 문학기행 후에도 여행의 설렘이 오래도록 지속될 수 있다.
남명 조식 선생이 살았던 시대는 지금부터 450년 전이다. 그러나 당시 그가 쓴 시를 읽으면 마치 어제 일처럼 보인다. 이것이 문학의 힘이 아니겠는가.
‘덕산에서 우연히 읊다’라는 시를 한번 읽어본다.
“우연히 사륜동에서 살아오면서
조물주가 속이는 줄 오늘 비로소 알았다네.
일부러 공연히 글 보내 수나 채우는 은자로 만들어 놓고
나를 부르는 임금님의 사자 일곱 번이나 왔다 가네.”
--남명 조식 시 ‘덕산에서 우연히 읊다’ 허권수 번역
산천군 시천면 덕산리 일명 사륜동에 산천재를 짓고 제자를 양육하던 때 조정에서는 계속 관리가 되라고 전갈이 온다. 무려 7회나 찾아 왔다고 이 시에 쓰고 있다.
삼고초려도 그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임금이 이렇듯 애타게 그를 찾았지만 그는 결코 벼슬길로 나아가지 않았다.
남명 조식 선생은 제자들에게 음풍농월이나 하는 시는 쓰지 말라고 일렀다. 시에는 당대 상황이 있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런 이유로 남명 조식의 시에는 서정성이 있는 시가 드물다. 남명 조식의 한시를 읽다 보면 친구와 제자들을 위해서 쓴 시가 많다. 시속에는 그가 얼마나 정이 많고 사려 깊은 사람인지 알게 된다.
문학의 역사는 장구하다. 우리 국토에도 문인들이 나고 살다 떠나간 곳은 무수히 많다. 우리들은 저마다 의식주와 물질적인 것에 의존하며 살아간다. 그러므로 정신적인 재산인 문학을 무시하는 것이 현실이다. 선진국일수록 자신의 나라 문인들을 존중하고 자랑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현실은 아직 문학적인 토대확보가 되고 있지 않고 있다.
‘인도와 세익스피어를 바꾸지 않겠다’는 영국인들의 이 말은 오만이라 하더라도 문학을 강조하는 말로는 의미가 있다. 프랑스인들의 문인사랑과 문학작품 이해력이 대단하다. 늘 문인들의 무덤에 싱싱한 꽃다발이 수북하게 쌓여 있는 것은 부러움이다.
우리나라에도 문인들의 유적들이 많이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문인들의 유적들조차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는 곳이 많다. 문학기행을 지속하면서 이곳을 탐방하고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적기 때문일 것이다. 문학기행은 수익성이 없어서 여행사에서도 감히 엄두를 내고 있지 못한다. 학술단체에서 조차 지속적으로 문학기행을 할 수 없는 것은 전문가의 섭외도 어렵거니와 지속할 수 있는 열정적인 동우회들이 없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도 문학기행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콘텐츠가 없는 상태이다. 제대로 된 단행본이 없는 것도 문학기행 분야가 얼마나 취약한 곳인가를 상징한다.
문학기행은 작가의 일생의 궤적을 답사한다. 혹 답사를 할 수 없는 것은 전문가의 설명을 들으면서 이해를 돕는다. 또한 문학작품속의 무대를 탐방하면서 이해를 도와주기도 한다. 문학기행에 참여한 사람들은 쉽게 동질감을 느끼고 금방 친구가 될 것이다. 문학작품을 공유하고 토론하는 가운데 아름다운 만남의 인연을 만들 수 있다.
문학작품의 무대나 원작자의 고향을 탐방하고 난 후 다시 그 작품을 읽으면 깊고 넓은 지식으로 보답하게 될 것이다.
문학기행을 통해 전문적인 콘텐츠를 얻게 될 것이며 이는 문학사의 복원적인 의미가 있다. 문학작품의 주인공이 살아 돌아온 기분이며, 자연 환경이 작품과 일치할 큰 감흥을 받아 문학에 매력을 가지게 된다.
프랑스에서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이미 약 100 여 편의 시를 의무적으로 암송한다고 한다. 이 때 암송했던 시는 성인이 되어도 그들의 삶속에 스며들어 행복한 일상을 만드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정치와 비즈니스를 비롯하여 기타 많은 분야에서 문학의 정서는 사회를 안정시키게 된다.
결국, 사회안정과 개인의 성공을 위해서는 문학공부를 해야 하는 것이다. 문학을 알지 못하고는 리더가 될 수 없고 성공한 비즈니스맨이 되기도 어렵다.
우리는 어떠한가. 중고등학교 시절에 문학소년, 문학소녀였지만 기성세대가 되면 문학을 잊어버리고 살아간다. 시집이나 소설을 읽고 있으면 부모님들이 공부를 하지 않는다며 걱정을 하는 분위기다. 이런 가정과 사회분위기 속에 자란 청소년들은 기성세대가 되면 문학을 멀리한다. 문학이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21세기에 문학은 중요한 성공의 조건이 될 것이라고 한다.
우리의 역사와 문학을 잘 모르고 외국인과 문화교류를 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문학은 비타민과 같은 존재이다. 문학은 행복하고 아름답게 살기위한 사람들에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의 삶속에 문학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문인들의 삶과 작품들을 알아야 가능하다. 문인들의 삶과 문학 속에는 잔잔한 감동이 있다.
이제 남명의 제자들이 남명 조식 선생을 선양하기 위해 세운 덕천서원을 찾아간다.
덕천서원은 1576년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최영경, 하항 등 사림(士林)들이 건립하였다. 세상을 떠난 지 5년 후에 그가 강학하던 자리에 건립한 서원이라는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된다. 1602년에 중건되고, 광해군 때인 1609년 현판과 토지, 노비 등을 하사받아 덕천(德川)이라는 이름으로 사액서원(賜額書院)이 된다. 이후 덕천서원은 남명학파의 본산이 된다. 남명 조식 선생의 수제자인 정인홍이 사망하게 되는 인조반정 등으로 정치적 풍파에 덕천서원은 화를 당한다. 그러나 더욱 큰 화는 흥선대원군에 의해 철폐된 것이다. 1930년대에 다시 복원되어 오늘에 이른다.
덕천서원은 400년이 넘는 은행나무가 홍살문 입구에서 서원을 지키고 서 있다. 홍살문을 지나면 솟을삼문인 시정문(時靜門)이다.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에 맞배지붕이다. 파란 잔디가 깔려 있는 마당을 가로 질러 정면에는 강당인 경의당(敬義堂)이 앉아 있다. 경의당 앞쪽으로 마당을 두고 동재(東齋)와 서재(西齋)가 좌우에 배치되어 있다.
동재와 서재는 유생들이 공부하며 거처하던 장소다. 경의당은 서원의 각종 행사와 유생들의 회합 및 토론장소로 사용되던 곳이다. ‘德川書院’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서원의 중심 건물이다.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집이다. 중앙에 대청이 있고 그 양쪽으로 툇마루와 난간이 달려있는 2개의 작은 방이 있다.
경의당 뒤쪽의 신문(神門)을 지나면 사당인 숭덕사(崇德祠)가 자리잡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에 맞배지붕집이다. 사당 중앙에는 남명 조식의 위패를 모셨고, 오른쪽에는 그의 제자인 최영경(崔永慶)의 위패가 놓여 있다.
시정문을 통해 덕천서원을 나오니 바람에 파란 은행잎이 흔들린다. 푸른 비늘처럼 파득거리다가도 우듬지 사이로 오고가는 안개에 물들기도 한다. 천왕봉에 걸린 구름들이 서풍을 타고 덕산리 방향으로 밀려온다. 비가 내릴 모양이다. 은행잎들이 조용히 흔들린다. 덕천서원을 지키고 서 있는 은행나무는 앞으로도 몇 백년을 더 살면서 수백 번의 잎들이 자라고 떨어질 것이다. 천둥과 번개 치고 비 바람 불면 마구 흔들릴 것이다. 세상에 흔들리지 않고 떨고 있지 않는 것이 어디 있으랴. 해아래 변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으랴. 모든 사물들이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이 시대에 변하지 않는 지리산을 찾아와 산천재에서 제자를 키우며 살았던 남명 선생을 찾아 왔다. 변화의 시대에 변하지 않는 것을 생각하고 그런 본보기의 사람을 찾는 일은 바보스러운 일이다.
승용차에선 오펜바흐의 ‘자클린의 눈물’의 선율이 슬프게 들려온다. 낮은 첼로 선율이 너무나 아름다운 이 곡은 슬픔을 낳지만 추억을 자극하는 촉매가 되기도 한다.
남명 조식 선생의 삶과 문학을 조명하기 위해 찾아오니 내 삶이 반성된다. 옛 사람들의 길을 걸어보는 것만도 축복이다.
역사의 민초들은 지배자들에게 짓밟혀도 살아남았다. 전멸을 당할 것 같았던 전쟁에도 살아남았다.
그러나 민초들은 가지마다 물이 오르고 새순이 돋아나는 희망의 봄과, 잎이 무성한 푸르른 여름, 갈색으로 변한 이파리 떨어지는 가을, 눈보라치는 겨울이 되면 황소바람에 떨면서 울음소리를 내곤 하였다. 지배자들은 그 소리를 들을 수 없었지만 그 소리를 듣는 이가 있었다. 처사들이었다. 조선의 대표적인 처사 남명 조식을 찾아 산청의 여러 곳을 쏘다녔다. 이번 기행은 16세기 임진왜란 직전 조선을 개혁하려고 했던 남명 조식을 조명하려고 기획했다. 그러나 내 지식의 한계는 그의 학문의 깊이에 접근만 하다가 끝날 정도가 되어 버렸다.
현대인들은 긴박한 경쟁과 생존을 핑계로 비장한 각오를 하며 살아간다. 우리는 같은 길 가는 상대의 안부를 물으며 서로의 등을 두드려 주어야 할 것이다. 우리 이제 잠시 달리던 길에서 잠시 멈추고 내가 달려왔던 길을 돌아보아야 한다. 나는 덕천서원 입구에 있는 푸른 잎새를 주워 오늘 날짜를 써 본다. 시간은 세월이 되는 법, 내 과연 살아 생전에 몇 번이나 은행잎에 날짜를 더 쓸 수 있겠는가.
변화의 시대에 마비된 정결한 영혼의 회복을 위해 산청을 찾아 왔다. 역사의 숨결을 들었으며, 지리산의 정기를 받고 돌아가려고 한다. 구름에 가린 지리산 천왕봉을 바라보며, 남명 조식 선생의 삶과 문학을 생각해 본다.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이내 빗방울이 떨어진다. 비와 함께 어둠이 내리고 있는 지리산의 아름다운 마을 덕산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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