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상(?-1135, 서경)
아래는 고운기 교수의 글입니다
[우리 오천 년 역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정시를 쓴 사람. 이렇게 부르자면 정지상을 빼놓고 생각할 수 없다. 그런데 그의 본관이 서경(西京)이고 호는 남호(南湖)이며, 처음 이름이 지원(之元)이었다는 정도, 한걸음 나아가 고향 또한 서경인데, 1114년 곧 예종 9년에 문과에 급제했다는 정도밖에 그에 대해서는 사사로운 일로 알려진 사실이 적다. 심지어 출생 연도조차 그렇다.
정지상에게는 최후의 기록만 존재한다. 인종 13년(1135), [고려사절요]가 전하는 그의 최후이다.
“김부식이 여러 재상과 상의하기를, ‘서경의 반역에 정지상·김안·백수한 등이 가담하고 있으니, 이 사람들을 제거하지 않고는 서경을 평정시킬 수 없다’ 하니, 여러 재상들이 그렇게 여기고, 지상 등 3명을 불러서 그들이 이르자 은밀히 김정순에게 말하여 무사로 하여금 3명을 끌어내어 궁문 밖에서 목을 벤 뒤에 비로소 위에 아뢰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부식은 평소 지상과 같이 문인으로서 명성이 비슷하였는데, 문자 관계로 불평이 쌓여, 이에 이르러 지상이 내응한다고 핑계하고 죽인 것이다’ 하였다.”
실로 이 기록은 고려시대로부터 전하는 숱한 두 라이벌과 관련된 입소문의 결정판이다. 정지상의 처형 이유는 묘청의 난 때 여기에 가담한 혐의였다. ‘지상이 내응한다’는 말은 이를 가리킨다. 그런데 그의 죽음에는 구구한 말이 뒤따랐다. 소문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김부식과 정지상 사이의 숙명적 관계가 정사(正史)에까지 오르자 세상은 누구나 이를 믿게 되었다. 이때 김부식의 나이는 벌써 환갑이었다. 그보다는 좀 어릴 것으로 보여 정지상은 50대 초중반이지 않았을까 한다.
그렇다면 김부식이 가졌던 정지상에 대한 ‘문자 관계의 불평’이란 무엇이었던가. 이에 대해서는 이규보가 가장 자세히 전해준다. 그가 지은 [백운소설] 속에서이다. 이규보는 ‘김부식과 정지상은 문장으로 함께 한때 이름이 났는데, 두 사람은 알력이 생겨서 서로 사이가 좋지 못했다’고 전제한 뒤 이야기를 시작한다. 지상이 쓴 다음과 같은 시 두 구절이 빌미가 되었다.
절에서 경 읽는 소리 끝나니 琳宮梵語罷
하늘빛이 유리처럼 깨끗하네 天色淨琉璃
요즈음 말로 공감각적인 표현을 이룬 기막힌 구절이다. 소리와 빛이 하나가 되었다. 시를 아는 김부식으로서야 이에 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식은 이 구절을 자기에게 달라 하였고, 지상은 냉정히 거절하였다. 이것이 ‘문자 관계의 불평’이다. 단순히 이 구절만 가지고 일어난 알력은 아니었을 것이다. 시에 관한 한 부식은 지상에게 한없는 콤플렉스를 느끼고 있었던 듯하다. 모반을 빌미로 가차없이 처형을 주도한 것은 이에 기인한다.
[백운소설]이 전하는 알력은 이제 정지상의 사후(死後)까지 이어진다. 지상이 부식에게 피살되어 음귀(陰鬼)가 된 다음, 어느 봄날 부식은 느꺼운 기분으로 한 구절 시를 지었다.
버들 빛은 일천 가닥 푸르고 柳色千絲綠
복사꽃은 일만 점이 붉구나 桃花萬點紅
정연한 대구를 이룬 득의의 구절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갑자기 공중에서 정지상 귀신이 나타나 부식의 뺨을 쳤다. 일천 가닥이니, 일만 점이니 잠꼬대 같은 소리 하지 말라는 것이다. 버들가지가 천 개인지 세어보았으며, 복사꽃 봉우리가 만 개인지 헤어보았느냐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렇게 고쳐준다.
버들 빛은 실실이 푸르고 柳色絲絲綠
복사꽃은 점점이 붉구나 桃花點點紅
실인즉 그렇다. 버들가지 세겠다는 것 아니며, 꽃봉오리 헤아리겠다는 것 아니다. 부식으로서도 그만큼 많다는 표현을 얻고 싶었는데, 천사(千絲)를 사사(絲絲)로 바꾸고, 만점(萬點)을 점점(點點)으로 바꿔 놓으니, 시의 품격도 높아지고 입에 달라붙듯 읽기도 좋다. 역시 시를 두고 부식은 지상에게 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부식은 더욱 마음속으로 지상을 미워하였다.
한시 강의를 하는 선생들은 이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려준다. 이 이야기로 김부식과 정지상이 숙명적 라이벌이었음을 알려주고, 더 멋진 시의 모범과 시 고치는 일의 요령을 가르쳐준다. 어쩌면 후자의 경우가 더 큰 목적이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는 정지상 귀신이 김부식을 한방에 때려눕히는 통쾌한 사건일 뿐이다.
사실 정지상은 인종 5년(1127) 좌정언(左正言)으로 있으면서 척준경(拓俊京)을 탄핵하여 유배 보냈다. 서릿발 같은 그의 칼날이 잘난 척하는 권신 귀족을 베어내니 모든 보통 사람들의 우상이 되었다. 게다가 그는 시를 잘 쓰지 않는가. ‘우헐장제초색다(雨歇長堤草色多)/송군남포동비가(送君南浦動悲歌)’로 시작하는 ‘대동강(大同江-교과서엔 '송인'으로 소개)’은 천하를 울린 명편이다. 그러나 ‘송인(送人)’ 또한 그에 못지않다.
뜰 앞에 한 잎 떨어지고 庭前一葉落
마루 밑 온갖 벌레 슬프구나 床下百蟲悲
홀홀이 떠남을 말릴 수 없네만 忽忽不可止
유유히 어디로 가는가 悠悠何所之
한 조각 마음은 산 다한 곳 片心山盡處
외로운 꿈, 달 밝을 때 孤夢月明時
남포에 봄 물결 푸르러질 때 南浦春波綠
뒷기약 그대는 제발 잊지 마소 君休負後期
3, 4행과 5, 6행의 대구를 보라. 홀홀(忽忽)과 유유(悠悠)는 한자어임에도 그냥 우리말처럼 들리고, 편심(片心)과 고몽(孤夢), 산과 달은 절묘의 극치에서 마주하고 있다. 가을날의 이별을 이렇듯 애잔하게 그린 시가 또 있을까. 복잡한 정치판의 파워게임에 휩쓸리지 않고, 그가 그냥 시인으로 살았더라면, 당대의 시적 수준을 얼마나 끌어올렸을지, 오늘날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가편(佳篇)을 남겨주었을지, 정말 아무도 모른다.
정지상은 서경 사람이었다. 그는 서경을 사랑했고, 고려의 웅지를 좀 더 크게 떨치자면 도읍을 서경으로 옮겨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인종 12년(1134) 12월, 우정언 황주첨(黃周瞻)이 “제(帝)라 칭하고 연호를 제정하소서”라고 왕에게 청하였다. 사실 이 일의 배후에는 정지상이 있었다. 중국에 사대하는 그늘에서 벗어나자는 말이었다. 그런 꿋꿋한 기상의 정지상은 일찍이 자신의 고향 서경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번화한 거리 봄바람에 보슬비 지나간 뒤 紫陌春風細雨過
가벼운 티끌조차 일지 않고 버들개지만 휘늘어졌다 輕塵不動柳絲斜
푸른 창 붉은 문에 흐느끼는 노랫가락 綠窓朱戶笙歌咽
이 모두 다 이원(梨園)의 제자 집이라네 是梨園弟子家
제목은 ‘서도(西都)’, 서경을 아예 도읍으로 여기고 붙인 이름이다. 봄비가 촉촉이 내린 번화한 서경 거리를 그리고, 버들개지 휘늘어진 아름다운 풍경이 뒤따른다. 이원(梨園)은 당나라 때 음악과 춤을 가르치던 곳이다. 당나라에 필적할 화려함이 서경에 넘친다는 자부심이었다.
정지상은 이미 인종 6년부터 서경천도론에 기울어 있었다. 묘청과 백수한 같은 이들의 말에 따라, “개성(開城)의 기업이 이미 쇠하여 궁궐이 다 타서 남은 것이 없고, 서경에는 왕기(王氣)가 있으니 마땅히 임금께서 옮겨가서 상경으로 삼아야 한다”고 공언하였다. 6년 뒤인 인종 12년 9월, 묘청은 왕에게 서경에 한번 오라고 청하였다. 모반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김부식은 갖은 이유로 이를 말렸다.
“올여름에 벼락이 건룡전을 친 것이 길한 징조가 아니온데, 벼락 친 그곳으로 재앙을 피하여 간다는 것이 또한 어긋나지 않습니까. 더욱이 지금 가을 곡식을 거두지 않았는데 행차가 출동하면 반드시 벼를 짓밟게 될 것이오니, 백성을 사랑하고 물건을 아끼는 뜻이 아닙니다.”
[고려사절요]에 기록된 대목이다. 결국, 왕의 서경 행차는 수포로 돌아가고, 막다른 길에 몰린 묘청은 반란의 칼을 뽑아들었다. 그것은 곧 정지상의 최후로 이어졌다. 조선의 만물박사 이긍익(李肯翊)은 그의 [연려실기술]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어쩌면 김부식과 정지상을 비교하는 가장 정확한 표현임에 틀림없으리라.
“김부식은 풍부하면서도 화려하지는 못하였고, 정지상은 화려하였으나 떨치지는 못하였다.”]
아래는 '송인'에 대한 감상을 옮겨 왔다.
雨歇長堤草色多 우헐장제초색다
送君南浦動悲歌 송군남포동비가
大同江水何時盡 대동강수하시진
別淚年年添綠波 별루년년첨록파
이 시는 고래(古來)로 한시(漢詩)의 명품(名品) 가운데의 명품으로 꼽힌다. 특히 한시를 짓는 소객(騷客) 가운데 이 시를 평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이 시는 많은 사람의 사랑과 관심을 받는 작품이다.
이 시는 대동강의 부벽루(浮碧樓)에 걸려 있었다. 고려, 조선 시대의 숱한 시인들이 대동강의 아름다움을 읊었고 그 시 중에 상당수가 부벽루에 액자로 장식되어 있었다. 명(明)나라의 사신이 올 적에 평양에 들리면 찾는 명소가 바로 이 부벽루이다. 중국의 사신을 맞이하는 접반사들은 미리 부벽루의 시들을 치우고 오직 정지상의 '送人'만 걸어 놓는단다. 중국의 사신들이 '送人'을 보면 모두 신품(神品)이라고 극찬했다고 한다. '送人'을 조금만 살펴보자.
먼저 기구(起句: 제 1구로 시상詩想을 일으키는 역할)와 승구(承句: 제 2구로 起句를 이어 받아 시를 전개)를 살펴보자. 지금은 바야흐로 봄이다. 겨우내 얼어붙었던 모든 만물이 봄비가 온 뒤로 생기발랄함을 얻었다. 특히 긴 둑에 풀들은 파릇파릇 돋아 봄날의 정취를 돋우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밖으로 나와 임의 손을 붙잡으며 희망과 부푼 꿈을 안고 인생을 설계하며 상춘(賞春)을 하고 있다. 그러나 화자는 지금 어떠한가. 남포에서 사랑하는 임을 떠나보내고 있다. 차라리 비라도 주룩주룩 내린다면 화자의 심사를 달래주겠지만, 비가 그친 뒤의 맑은 하늘과 이 비를 머금고 싹을 틔운 풀잎들은 모두 화자의 이별을 조롱하는 듯하다. 아 세상과의 불일치를 무엇으로 감당하리오.
이 시의 묘미(妙味)는 바로 전구(轉句: 제 3구로 시상을 변환시키는 역할)에 있다고 하겠다. 난데없이 갑자기 '대동강 물이야 언제나 마르리'라는 구절은 보는 이로 하여금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아니 지금 사랑하는 임과 헤어지는 판국에 대동강 물이야 어찌 되든 무슨 상관인가. 더욱이 대동강 물이 왜 마른다고 하는가. 이런 의문은 결구(結句: 제 4구로 시상을 맺는 구)에 가서 해결된다. 대동강 물이 마르지 않는 이유가 이곳에서 해마다 연인(戀人)들이 모여 석별(惜別)의 아쉬움에 눈물을 흘리고 이 눈물이 바로 대동강 물에 보태어져 마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절로 무릎을 치게 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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