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 일화(ㅈ-ㅎ)

정일근(1958-, 경남 진해)

톰소여와허크 2011. 3. 5. 09:38

정일근(1958-, 경남 진해)


아래 내용은 2010우리시회 여름자연학교 자료집에서 인용했습니다.


[

운동장 조례시간이면

사마귀 난 내 손등이 슬펐다

어머니는 술 팔고

우리는 애비 없는 자식이었다

하나뿐인 방에까지 손님이 들면

동생은 도둑고양이처럼 웅크려

부뚜막에 누워 잠자고

안데르센 동화책을 읽어야 하는데

그림숙제를 해야 하는데

밤늦게 술 주전자를 나르며

같은 반 그 가시내 볼까 부끄러워

나는 자꾸만 달아나고 싶었다

앞으로 나란히

앞으로 나란히

내미는 손을 앞질러 달아나고 싶었다

아픈 풍경들 박박 지워버렸지만

돌아보면 나는 여전히 그곳에 남아

부끄러운 손등 감추지 못하고

앞으로 나란히

앞으로 나란히


                 - 졸시,「 앞으로 나란히」전문

 

  내가 가졌던 최초의 내 책은 ‘안데르센 동화전집’이었다. 그것도 한 권이 아니라 1960년대, 그 당시 귀하디귀한 컬러판으로 만들어진 6권짜리 전집이었다. 책상 위에 놓여있는, 하얀색 커버 안에 6권의 책이 번호대로 나란히 꽂힌 그 전집을 볼 때마다 저 책의 주인이 나라는 생각에 들떠 잠이 오지 않았다.

  시골 할아버지 댁에 살 때 전기가 들어왔을 때도 그렇게 설레지 않았다. 아버지가 집에 흑백TV를 들여놓았을 때도 그렇게 설레지 않았다. 책이 있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자다가도 일어나 내 책이 잘 있는지 살펴보았을 정도다.

  하나 뿐인 여동생에게도 오빠인 내가 직접 보여주기 전에는 책을 만지지 못하게 엄명을 내렸다. 책에 때가 탈까싶어 친구들은 아예 집으로 데리고 오지 않았다. 나는 초등학교 5학년이었고 늦봄이었다. 그렇게 나는 내 책을 가졌고 나의 책읽기는 시작되었다.

  그렇다고 그때 나는 잘 사는 집의 아들이 아니었다. 책을 가지기 한 해 전에 아버지가 뺑소니 교통사고로 돌아가시면서 빚잔치로 살림이 거덜 난 가난한 집안의 가난한 아들이었다. 그때 어머니는 어린 두 자식과 먹여 살리기 위해 작은 가게를 빌려 밥장사 술장사를 하였다.  그 책이 왜 내 책이 되었는지를 이야기하려면 내 가족사를 털어 놓을 수밖에 없다. 나는 벚꽃이 피는 군항의 도시인 진해에서 태어났다. 전근이 잦은 군인인 아버지 덕에 어린 시절은 시골에서 할아버지의 손자로 자랐고,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다시 진해로 돌아와서는 군복을 벗고 예비역이 된 아버지의 아들이 되었다.

  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돌아가셨다. 뺑소니 택시사고로 싸늘한 주검이 되어 돌아온 아버지는 아내와 초등학생인 아들, 딸을 가진 가장이었고, 대가족의 장남으로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모시고 중·고등학생이었던 고모들을 공부시켜야 할 의무를 가진 35살의 젊은 아버지였다.

  아버지의 유고로 우리 집은 한 순간에 풍비박산이 났다. 그 전 해 시골의 많은 농사를 정리하고 아들 따라 진해로 이주해온 할아버지 식구들은 아버지가 사업을 하면서 남긴 부채로 해서 집마저 잃고 일곱 평 반 홉 짜리 양철지붕 아래 살게 되었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시멘트 봉투를 털어 작은 종이봉투를 만들어 팔았다. 그 시멘트 가루 덕에 할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 천식 치료약을 먹어야 했다. 언제가 할머니 하신 한탄의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내가 먹은 약이 몇 십 가마는 넘을 것이다’라고. 그 시절의 지독한 가난으로 얻은 병 탓으로 할머니는 수십 가마의 약을 먹으며 사셨던 것이다.

  어머니는 나와 동생을 공부시키기 위해 장사를 시작했다. 서른세 살 한 많은 여자의 일생이 길바닥에 던져진 것이었다. 어머니의 피눈물 같은 세월이 시작된 것이었다. 아버지를 잃은 나는 젊은 어머니의 눈물이 더해져 병약하고 눈물 많은 어린이가 되었다. 또 그 눈물이 나를 조숙하게 만들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유행가 가사를 받아 적어 따라 불렀고 진해의 벚꽃이 비바람에 질 때는 안타까워 혼자 울기도 하였다. 그러다 보니 국어책에 실린 시를 모두 외우게 되고 고모들의 중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의 시들까지 다 외우게 되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시를 줄줄 외는 내 암기력을 문학적인 자질로 이해하셨는지 나는 문예반으로 보내졌다. 그리고 처음 나가본, 도 대회에 보낼 시 대표를 뽑는 백일장에서 실력파로 소문난 6학년들을 제치고 장원을 했다.

  상을, 병약하여 개근상도 한 번 받아가지 못한 아들이 처음으로 교육장 상을 받아가니 어머니가 그렇게 좋아할 수 없었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나는 어머니가 웃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상장을 들고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자랑을 하셨다.

  그때 나는 결심했다. 나는 글짓기를 잘하는구나. 앞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 되어야겠구나. 무엇보다 어머니가 좋아하니, 저렇게 웃으시니 시를 써서 어머니를 행복하게 해드려야겠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나는 장래희망을 시인을 정했던 것이다.

  어머니는 아들이 처음 받아온 상장의 보상으로 꽤 비싼 ‘컬러판 안데르센 동화전집’을 사주신 것이다. 그것도 책장사에게 1년 할부로 사셨다. 어려운 살림에 어머니는 내게 참으로 큰 선물을 하신 것이었다. 그래서 내 책이 생긴 것이었다.

  그 시절 모든 것이 흑백의 시절이었다. TV도 신문도 교과서도 학교에서 읽었던 동화책도 모두 흑백이었다. 컬러판 동화전집이란 것이 지금에 비교하면 조잡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지만 그 책이 나를 처음으로 꿈을 꾸게 만들었다. 가난하고 눈물 많은 나에게 문학이란 꿈을 처음 꾸게 한 것이다.

  안데르센 동화를 읽는 동안 나는 동화 속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 마법과 같은 시간이 없었다면 나는 몸과 마음이 아프기만 한 유년시절을 보냈을 것이다. 책을 잃는 동안 나는 그 고통의 시간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먼 미래에 내가 찾아갈 마법의 성 같은 것을 어렴풋이 보았다. 그건 책읽기가 만들어주는 꿈이었다.

  만약 어머니가 어려운 형편에 무리하면서까지 책을 선물하지 않았다면 나는 꿈이란 것을 꾸지 않았을 것이며 시인이란 희망을 가지지 못했었을 지도 모른다. 안데르센 동화책 속에는 내가 보지 못한 세상이 있었다. 그 세상은 화려하고 따뜻했다. 나도 그런 글을 쓰고 싶었다.

  나는 6학년 때에도 같은 대회에서 장원을 해 어머니를 즐겁게 만들어 주었다. 진해시 대표로 나간 두 번의 도 대회에서는 상을 받지 못했지만 그곳에서 만난 경상남도의 쟁쟁한 어린 문사들이 내가 우물 안 개구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백일장에서 만나 주소를 교환한 다른 도시의 친구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나는 세상에 난 많은 길을 만날 수 있었다. 그 길이 책이었다.

  나는 열심히 책을 읽기 시작했다. 학급문고를 다 읽고 학교도서관의 책을 다 읽고 책이 가르쳐주는 꿈의 길을 찾았다. 중학생 때도 문예반이었고 고등학교 때는 문예부장을 했다. 그러는 사이 나는 백일장마다 상을 휩쓰는 꽤 이름이 난 문학소년이 되어 있었다.

  초등학교 때에 받지 못했던 도 대회 상은 중학생이 되어서는 받았다. 나는 은행원이 되기 위해 상업고등학교로 진학했다. 진해에서 마산까지 버스를 타고 통학을 하며 나는 윤동주, 박인환 시인과 외국 유명시를 즐겨 읽고 외웠다. 제법 긴 시들도 학교를 오가며 외워버렸다.

  진해와 마산 사이 장복산이란 높은 산이 있고 산을 통과하는 마진터널이 있었다. 장복산에 낙엽이 지는 가을날에는 학교를 마치고 돌아올 때 터널 입구에서 내려 낙엽 위에 누워 시집을 읽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다고 나는 결코 모범학생은 아니었다. 선생님들이 보실 때는 유명한 사고뭉치였다. 졸업할 무렵 취직이 확정된 모 시중은행 입행을 취소하고 나는 예비고사를 치고 대학진학을 선택했다. 다행히 그 사이 어머니는 장사로 조금은 기반을 잡으셨고 외아들의 대학진학을 흔쾌히 허락해주셨다.


  第一信


  아직은 미명이다. 강진의 하늘 강진의 벌판 새벽이 당도하길 기다리며 죽로차竹露茶를 달이는 치운 계절, 학연아 남해 바다를 건너 우두봉牛頭峰을 넘어 오다 우우 소 울음으로 몰아치는 하늬바람에 문풍지에 숨겨둔 내 귀 하나 부질없이 부질없이 서울의 기별이 그립고, 흑산도로 끌려가신 약전 형님의 안부가 그립다. 저희들끼리 풀리며 쓸리어 가는 얼음장 밑 찬물 소리에는 열 손톱들이 젖어 흐느끼고 깊은 어둠의 끝을 헤치다 손톱마저 다 닳아 스러지는 적소謫所의 밤이여, 강진의 밤은 너무 깊고 어둡구나. 목포, 해남, 광주 더 멀리 나간 마음들이 지친 봉두난발蓬頭亂髮을 끌고 와 이 악문찬 물소리와 함께 흘러가고 아득하여라, 정말 아득하여라 처음도 끝도 찾을 수 없는 미명의 저편은 나의 눈물인가 무덤인가 등잔불 밝혀도 등뼈 자옥이 깎고 가는 바람 소리 머리 풀어 온 강진 벌판이 우는 것 같구나.



  第二信


  이 깊고 긴 겨울밤들을 예감했을까 봄날 텃밭에다 무를 심었다. 여름 한철 노오란 무꽃이 피어 가끔 벌, 나비들이 찾아와 동무해 주더니 이제 그 중 큰 놈 몇 개를 뽑아 너와지붕 추녀 끝으로 고드름이 열리는 새벽까지 밤을 새워 무채를 썰면, 절망을 썰면, 보은산 컹컹 울부짖는 승냥이 울음소리가 두렵지 않고 유배流配보다 더 독한 어둠이 두렵지 않구나. 어쩌다 폭설이 지는 밤이면 등잔불을 어루어 시경강의보詩經講義補를 엮는다. 학연아 나이가 들수록 그리움이며 한이라는 것도 속절이 없어 첫해에는 산이라도 날려 보낼 것 같은 그리움이, 강물이라도 싹둑싹둑 베어버릴 것 같은 한이 폭설에 갇혀 서울로 가는 길이란 길은 모두 하얗게 지워지는 밤, 사의제四宜齋에 앉아 시詩몇 줄을 읽으면 아아 세상의 법도 왕가의 법도 흘러가는 법, 힘줄 고운 한들이 삭아서 흘러가고 그리움도 남해 바다로 흘러가 섬을 만드누나.

                             - 졸시,「 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전문


  나는 사범대학 국어교육과로 진학했다. 서울과 경남지역 예비고사에 모두 합격했다. 그 시절 시도별 지역을 선택해 예비고사를 쳐서 합격해야 그 지역에 있는 대학에 갈 수 있었다. 어머니는 서울행은 막으셨다. 학비는 댈 수 있지만 하숙비는 줄 형편은 못 된다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외아들을 슬하에서 떠나보내기 싫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집에서 학교에 다니는 것이 어머니에게는 학비와 아들이란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려워도 같이 살며 어려운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어머니의 뜻을 따랐다.

  내가 국어교육과를 택한 것은 국어교사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선택한 대학에 국문과가 없어서였다. 시인이 되기 위해서 국어교육과도 좋을 것 같았다. 최선이 아니라도 차선의 선택이었다. 사실 나는 국어교육과와 국문과의 차이를 잘 알지도 못했다.

  대학에 입학해서 초등학교에서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내가 읽은 책들과 내가 외운 시들이 유신정권이라는 제도교육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한 것을 알았다. 대학에 들어와서《창작과 비평》과《문학과 지성》이란 문예지가 있는 것도 처음 알았고 처음 읽었다. 판금된 김지하의 시집을 숨어서 읽었다. 김소월과 윤동주의 시를 시의 전부로 알았던 나에게 새로운 얼굴을 한 시들이 충격으로 다가왔다.

  대학은 혼돈의 책이었다. 나는 아무 것도 모른 채 그 책들을 읽기 시작한 한 마리 작은 나비였다. 광풍이 불고 비바람이 몰아치는 꽃밭에서 앉을 곳을 찾지 못해 이리저리 날고 있는 날개 젖은 나비였다.

  좋은 국어교사를 양성시키는 딱딱한 학과 공부와는 거리가 멀어졌다. 하지만 대학 4년 동안 나는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을 한다는 한 가지 목표를 세웠다. 강의시간엔 늘 뒷자리에 앉아 시집을 읽었다. 시험기간에도 공부보다는 시를 썼다. 늘 최하위권의 성적을 면치 못했지만 읽을 시집이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행복했다.

  대학시절 내내 하루도 시집을 읽지 않은 날이 없었고 시를 생각하거나 쓰지 않은 날은 없었다. 그런데 시는 사람을 뜨겁게 만드는 우리시대의 약이었다. 시를 읽을수록 캄캄한 현실에 분노하게 되었고 시를 쓸수록 나는 더욱 뜨거워져 갔다.

  시대도 점점 뜨거워졌다. 박정희 대통령이 저격당하고 부마항쟁과 광주항쟁 일어나고 계엄령이 내리고 계엄군이 군홧발로 학생들을 짓밟는 그 시간을 아프게 체험하며 나의 시도 뜨거워져갔다.

  한국문학사는 80년대를 ‘시의 시대’라고 정의하기도 한다. 그건 그 시대가 만든 저항의 문학사였다. 시는 그 시대에 저항하는 뜨거운 목소리였다. 시는 탄알을 장전한 무기를 든 계엄군을 향해, 박정희의 독재정권을 무력으로 승계한 피의 군사정권에 항해 내가 들 수 있는 저항의 무기였다.

  나도 서슴없이 그 무기를 들었다. 나의 시가 총알이 되어 군사정권의 심장부에 박히길 나는 희망했다. 나는 시를 쓰는 혁명가를 꿈꾸었다. 혁명! 그 얼마나 가슴 뛰는 말이었던지 육신이 산산이 부서지더라도 조국의 혁명가로 남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가슴을 뛰게 하는 뜨거운 시를 쓰는 일뿐이었다. 시로써 질곡의 역사와 싸우는 혁명에 복무한다고 생각했다. 시를 썼기에 붉은 벽보를 썼고 구호를 외쳤고 저항의 노래를 불렀다. 시를 쓰는 대학생이었기에 시위대 제일 앞에 섰다. 그건 역사 앞에서 내가 몸으로 쓴 시였다.

  최루탄 속에서도 경찰의 수배를 받으면서도 나는 시를 썼다. 중·고등학교 문학 지망생들의 요람이었던《학원》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전국의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문예작품 현상공모전이 생겼고 그 공모전에서도 나는 여러 상을 받았다.

  80년대 초반 무렵 대학가에는 ‘대학문단’이라는 것이 있었다. 대학문단을 거친 뛰어난 신인들이 속속 문단으로 진입했다. 대학문단에서 이름을 익힌 임철우, 하재봉, 안재찬(류시화), 김정숙(김형경), 백학기, 윤성근, 안도현 등이 신춘문예나 문예지 신인상을 통해 등단할 때까지 나는 여전히 대학생에 야학 교사였고 최루탄 속이 아니면 경찰에 쫓기고 있었다.

  나의 대학시절도 요란하였다. 학보사 기자와 총학생회 간부, 서클연합회장과 학원자율화 추진위원을 맡는 동안 제적과 재입학, 무기정학 3개월과 수배의 기록을 남겼다.

  1984년 10월, 대학 4학년이었던 나는 그땐 무크지였던《실천문학》(통권5호)을 통해 시인이 되었다. 붉은 표지의 실천문학은 나에게 신춘문예보다 매력적인 문학지였다. 대학을 다닌 7년 동안 야학교사로 일하며 내가 느낀 것들을「야학일기」란 연작시로 써 실천문학 신인작품모집에 투고를 했는데 7편의 시가 당선되었다는 통보를 받았다.

  나는 대학시절이 그렇게 끝이 난다고 생각했다.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하겠다는 꿈을 가졌지만 그 때까지 나는 신춘문예 시 부문에는 한 번도 투고해 보지 못했다. 작품을 차분하게 정리할 시간도 없었고 자신도 없었다. 《실천문학》이라는 선망하는 잡지를 통해 시인이 된 것도 좋았다. 그건 또 우리 대학이 생긴 이래 내가 재학 중 등단 시인 1호를 기록을 한 하나의 사건이기도 했었다.

  하지만 시대는 내 편이 아니었지만 운명은 내 편이었다. 졸업준비를 하던 중 11월3일 학생의 날 시위가 격렬해졌고 나는 다시 경찰의 수배를 받았다. 나는 몽돌해변을 가진 경남 거제 학동이란 바닷가에서 숨어 지냈다.

  그때 내 가방에는 나와 함께 도망 온 운명 같은, 한 권의 책이 있었다. 소설가 문순태의 <유배지>라는 책이었다. 정약용, 허균, 조광조, 김정희 등이 유배 간 유배지에 대한 르포를 묶은 책이었다. 학동바다에 숨어 그 책을 읽으며 그들의 유배지에 불투명했던 나의 현재와 불확실한 내일을 이입시켜 보았다.

  내 은신처로 연락이 되었던 후배가 신춘문예 사고들을 보내왔다. 11월이면 늘 신문사의 신춘문예 사고를 올리던 나를 기억했던 후배의 정성이었다. 아, 그 유배지에서 신춘문예라니. 나는 엎드려 시를 썼고 그 시로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이 되었다. 불과 2달 사이에 2번의 등단 문을 열고 나갔다.

  《실천문학》에 이어 한국일보 1985년 1월 1일자에 실린「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란 시가 당선되어 내가 나에게 한 약속을 지킬 수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기 전에 나는 신춘문예 시인이 된 것이 자랑스러웠다. 그건 책이 만들어준 내 운명과의 약속을 지킨 것이었다.

  신춘문예는 문학의 완성이 아니라 출발이다. 그러나 그 출발선에 서는데도 경쟁이 치열했다. 나는 누구에게도 시를 배우지 않았다. 나에게 시를 가르쳐 준 것은 역사였고 그 시대였고 시인들의 시집이었다. 그리고 펜혹이 박히도록 습작시대를 지나온 나의 손이었다.

  나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가졌던 꿈의 문을 내 스스로 열고 책읽기와 글쓰기를 통해 시인이 되었다. 대학에서 겪었던 길고 긴 혼돈의 문을 닫고 나는 다시 꿈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글을 읽고 쓴다는 것이 내 업이었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알 수 없었지만 피할 수 없는 또 다른 운명 앞에 나는 부르르 떨리는 몸을 감출 수 없었다.


여기 한 권의 책이 있다

덮여 잠자는 책이 아니라

펼쳐져 깨어있는 책이 있다

이미 완성된 책이 아니라

이 순간에도 씌어지는 책이 있다

하여 이 책에는 마침표가 없다

이 책에는 마지막 장이 없다

처음은 있으나 끝은 없는 책

끝은 없으나 내일이 있는 책

아침이 찾아오는 이상

영원히 살아 숨 쉬는 책이 있다

자신의 피를 찍어 기록하는 자만이

이 책에 이름을 남길 수 있으니

손으로 하늘을 가린 자들은

이 책의 기록자가 될 수 없고

이 책을 읽을 수도 없다

뜨거운 손을 가진 사람이 기록하는 책

뜨거운 눈을 가진 사람이 읽는 책

한 장 한 장 읽어갈 때마다

피가 되고 심장이 되는 책

사랑이 되고 낭만이 되는 책

지성이 되고 사상이 되는 책

그리하여 사람을 만드는 책이 있다

그 책이 어디에 있는지 묻는다면

나는 자랑스럽게 답할 수 있으니

지금 그대들 손에 그 책이 있다


                 - 졸시,「 책」전문


  1998년 5월 나는 요란하게 쓰러졌다. 시인이 되고 대학을 졸업하고 나는 쉬지 않고 달려갔다. 중학교 교사에서 신문사 기자로 달려갔고 나를 유혹하는 속도 가속도를 따라 달려갔다. 나는 세상에 많은 것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게 가는 것이었기에 나는 뒤돌아볼 시간이 없었다.

  나는 달리는, 멈출 수 없는 오토바이 위에 앉은 인생이었다. 나의 20대, 30대가 수박 겉핥기식의 책읽기처럼 달려갔다. 그건 읽기만할 뿐 황소의 되새김질 같은 사유가 없는 것이었다. 목차도 보지 않은 채 제목만 읽고 던져버리는 책 같은 인생이었다.

  그때는 몰랐다. 달려가야 하는 것이 삶이고 존재의 이유로만 알았다. 그러나 생을 액셀러레이터로 밟는 가속도는 결코 결승점이나 도착지가 없는 무모한 레이스라는 것을 1998년, 내가 마흔이 되기 전까지는 어리석어 몰랐다. 마흔, 그건 내 운명의 분수령이었다. 내게 불혹의 시작은 최악이었다. 갑자기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갔다. 의사는 뇌종양이란 진단을 내렸고 최악의 경우 2개월 정도밖에 살 수 없다고 했다. 내 시간이 2개월밖에 남지 않았다는 진단을 받았을 때, 그 때서야 나는 달리는 것만이 삶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달려가면 갈수록 내가 도착하려는 인생의 결승점에서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멀어진다는 것을 알았다.

  깨달음이란 급정거를 할 때 찾아오는 것이었다. 뇌종양이란, 요란한 급정거를 했을 때 나는 내가 가진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 마흔에 나는 돌멩이가 날아온 유리창처럼 와장창 박살이 나고 말았다. 달려온 시간이 후회스러웠지만 후회하기엔 너무 늦었다.

  하지만 운명은 다시 한 번 나에게 기회를 주기로 한 모양이었다. 2차례의 뇌수술과 1년이 넘는 투병을 통해 나는 목숨을 건졌다. 목숨을 건졌지만 나는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다시 텅텅 빈 주머니를 가졌을 때 나는 내 주머니에 마지막까지 나를 버리지 않고 기다려준 것이 책이고 시라는 것을 알았다. 아아, 빈 주머니에서 책을 만나고 시를 만났을 때 손으로 전해져오던 그 따스함을 잊지 못한다.

  그 이후 나는 울산시 울주군 웅촌면 은현리란 아름다운 마을이름을 가진 시골마을에서 살고 있다. 다시 책의 시간으로 돌아가기 위해 나는 도시와 아파트와 시멘트와 수돗물을 미련없이 버렸다.

  은현리에서의 삶이 8년이 지났지만 나는 여전히 국외자다. 한 평 묵정밭도 가지지 않고 있는 나를, 은현리가 은현리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은현리에 산다는 것이 평화롭고 자랑스럽다.

  그건 은현리는 내가 새로 읽기 시작한 책이기 때문이다. 그 책에는 자연이 있다. 내가 빠르게 달려오느라 읽지 못한 꽃의 시가 있고 바람의 소설이 있다. 나는 그 모든 책의 첫 페이지부터 다시 연필로 밑줄을 그으며 읽었다. 때로는 또박또박 필사를 하며 읽었다. 다시 손가락에 펜혹이 생기기 시작했다.

  어느 해였다. 은현리 들판으로 가을이 오고 있었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안개가 은현리를 덮었다. 지독한 안개였다. 들판으로 산책을 나갔다가 안개 속에 갇히고 말았다. 은현리도, 은현리로 이어지는 모든 길들이 안개 속에서 행방불명이 되고 말았다.

  그건 자연의 비밀스러운 의식이었다. 사람이 보지 못하도록 안개의 막을 내려놓고 여름과 가을이 자리를 바꿔 앉고 있었다. 나는 그 안개 속에서 여름이 떠나는 눈물의 냄새를 맡았고 가을이 돌아오는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

  그 비밀스러운 의식에 마을의 그 많은 개 한 마리도 짖지 않았다. 숲에 깃든 새들도 기척을 내지 않았다. 그때 나는 밀교의 경전을 읽듯이 은현리 밤안개를 읽고 있었다. 그것은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했고 읽지 못한 책이었다. 시간이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넘기는데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그랬다. 은현리는 내가 다시 읽어야할 운명의 책이었다.


  은현리란, 내가 늘 읽는 책에 대해 좀 더 이야기 해야겠다. 은현리는 울산이라는 거대한 공업도시에 있는 시골마을이지만, 은현리란 책제목처럼 아름다운 마을이다. 내게 은현리가 아름다운 이유는 자연이 살아 있고 그 자연 속에 사람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넓은 벌판이 펼쳐져 있고 뒤로는 산이 솟아 있다. 그 산이 정족산(일명 솥발산)이다. 정족산에는 산지 늪으로 알려진, 환경보호지구인 무제치늪이 있다. 그 덕분에 은현리 사람들과 꽃과 나무, 개와 도둑고양이 할 것 없이 6,000년 전에 만들어졌다는 무제치늪이 걸려서 내려주는 깨끗한 산물을 받아먹고 살고 있다.

  나는 은현리에 와서 수돗물 시대를 청산할 수 있었다. 자연 속에 흐르는 물을 받아먹고 살았던 사람의 옛날로 돌아왔다. 좋은 책인『오래된 미래』의 저자인 헬레나 노르베리-호지가 히말라야 라다크에서 찾았던 그 오래된 미래를 나는 은현리에서 찾았다.

  물이 바뀌면서 나도 변하기 시작했다. 사람 몸의 70%가 물이다. 사람 몸을 구성하는 몰이 바뀌면 사람도 변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마당에 나무도 심고 꽃밭도 만들고 텃밭도 가꾸며 개도 키웠다. 삶이 재미있는 책처럼 재미있어지기 시작했다.

  사람이 만드는 책도 위대하지만 자연이 만드는 책도 위대한 책이다. 그 책 또한 인생의 필독서다. 이 땅의 서정시인을 자처했지만 나는 자연의 이름을 몰랐다. 자연의 책을 읽지 않고 살았다. 그런 후회가 나를 자연주의자로 만들었다. 자연이란 책이 나를 다시 변화시켰다.

  책을 읽는 것은 책을 쓰는 일이기도 한다. 은현리 사람이 되고나서 나는 4권의 신작 시집을 비롯해 10권이 넘는 여러 장르의 책을 썼다. 그 책들은 은현리라는 자연의 책을 읽지 않았다면 쓰지 못할 책이었다.

  나는 운명을 믿는다. 어머니가 사주신 안데르센 동화전집에서 시작된 책과의 인연이 내 운명을 바꾸었다고 믿는다. 또한 미래에 만날 책이 나의 미래를 바꿀 것이라고도 믿는다. 책이 운명을 만든다. 책이 만드는 운명의 길을 따라 나는 지금도 책 속으로 걸어가고 있다.]


 

'문인 일화(ㅈ-ㅎ)'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식 (1501-1572, 경남 합천)  (0) 2012.02.14
조세희(1942 ~, 경기도 가평 )   (0) 2011.05.25
정지상(?-1135, 서경)   (0) 2010.10.16
홍랑(?-1599, 함경도 홍원)   (0) 2010.08.30
허균(1569∼1618, 강원도 강릉)  (0) 2010.08.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