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태우다/ 김명인
내다 버릴 곳도 마땅찮아 책들 태워 구들 덥힌다
홑 창호를 뚫고 밤새도록 혹한 파고든 고향 집
책장이나 찢어 군불 지피려
아궁이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불길이 옮겨붙는지 활자의 파란 넋들이
일어났다 주저앉는다 스러지고 스러지는
저 아궁(我窮) 속의 어떤 학습은
캄캄한 미로를 헤맸으나 굴뚝 없는 구들이었으니
매운 연기로 가득 찼으리라 생각이 드는 오늘 아침
불길이 넘기는 영문 원서는
책보다 먼저 타오른 큰형님 유품이리라
곁불에 찌드는 도형은 육지의 항해술로 파선한
작은형의 좌표고 크레파스 그림일기는
부도를 내고 피신한 아우네 조카들 일과겠지만
여기 어느 책갈피도 들춘 적이 없어 나는
실패한 형제들의 교과서를 찢어 불길 속에 던져 넣는다
책을 태워 온기를 얻으려니 평생
문자에 기대 여기까지 온 나의 분서갱유가
우스꽝스럽다 반면(反面) 핥는 불꽃이
비꼬는 혀들 같다 노모의 성경책까지 함께 사르니
교과서 구할 길 없어 친구의 책 훔쳤던
중학교 1학년짜리 오래된 아픔까지 겹쳐 너울거린다
저 잿더미 속으로 스러지는 활자
누구도 다시 일으켜 세우지 못하리니
학습이란 태워 올리는 불길일까, 타고 남은 잿더미일까?
- 『꽃차례』, 문학과지성사, 2009.
* 책을 거꾸로 잡든, 열심히 파고들던 간에 책만 가까이 하면 훌륭한 사람이 된다고 떠들고 또 그렇게 믿는 편이기도 하다.
하지만 수학 교과서를 지나와도 셈이 흐린 사람이 있고, 도덕 교과서를 지나와도 도덕적이지 않은 사람이 있듯이 책은 활자 그 자체에 불과한 면이 분명 있다. 더 나은 삶을 위하여 책과 교과서를 지나온 형제들의 삶도 기대와 어긋나게 진행되었다고, 그들의 책을 태우면서 화자는 생각한다.
평생 책 보기를 업으로 했을 화자도 “굴뚝 없는 구들”처럼 출구를 찾지 못하고 지금껏 헤매는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책이 삶의 “온기”를 주는 방편이기를 원했지만 날름거리는 불꽃에서 그것마저도 무의미한 바람일 수도 있겠다는 데 생각이 미친다.
화자의 말대로 책은, 그로 인한 학습은 “불길일까”? “잿더미일까”? 둘 다 일까?
소용에 닿지 않아, 아궁이에서 불살라지는 책이라 하더라도 이는 책 한 권의 운명일 뿐 책은 여전히 영혼의 불꽃이자 거름임을 부정하긴 어려울 것이다.(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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