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뻥의 나라에서/ 우대식

톰소여와허크 2012. 2. 3. 21:28

 

스페인 광장/ 강성일님 작

뻥의 나라에서/ 우대식

 

초등학교 3학년 막내와 돈키호테를 읽는 밤

11월 바람은 창을 두드리고

키득키득 책을 읽던 놈이

불현듯 묻는다

“아빠, 이거 다 뻥이지요?”

그와 깊은 가을로 여행을 하는 중이다

뻥의 마을에서 서성이다가

어린 그와 목로주점에 들어

설탕을 듬뿍 탄 와인을 한 잔 시켜주고 싶은 것이다

독한 술 한 잔을 단숨에 마시면

창을 꼬나들고 달리는 늙은 기사도 만날 것이다

도무지 세상에는 없는

공주들과 긴 늦잠을 자고

풍차 아래서 휘파람을 불고 싶은 것이다

뻥이 없으면 이 세상은 도무지 허무하여

살 수 없음을 그 아이가 불현듯 깨닫기를

중세의 성당에 앉아 기도하고픈 것이다

- 『단검』, 실천문학사, 2008.

 

* 세르반테스는 노예생활에서 감옥살이까지 꽤나 팍팍한 삶을 살았지만, 그의 <돈키호테>에는 여유와 유머가 넘친다. 돈키호테는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는, 좌충우돌에다 실수투성이인 늙은이로 우스꽝스럽게 극화된 인물이다. 그런 인물이 터뜨리는 허황된 사건이 독자를 사로잡는 이유가 뭘까? 아마도 ‘뻥의 매력’이 아닐까.

  이 시는 보는 각도에 따라서, ‘뻥의 나라’에서 살기 위한 최소한의 처세를 시인이 뻥치는 마음으로 삐딱하게 제시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아이에게 뻥을 빌어주는 아버지의 마음은 장난스런 뻥보다는 진실에 가까워 보인다. 그렇다면, 이때 뻥은 자기를 과대포장하거나 남을 속이는 뻥이 아니라 각박한 세상살이에 숨통을 틔워 주는 뻥이라고 봐야 한다. 무료한 일상의 되풀이를 벗어나게 하는 뻥이기도 할 것이다.

  시인은 “도무지 세상에 없는”, 잃어버린 동화의 한 장면을 다시 작동시키고 싶어 한다. 부풀려지고 엉뚱하다 하더라도 웬만한 것은 수용되고 웃어넘기는 “뻥의 마을”를 꿈꾸는 것일까. 품격 있게 뻥치는 이 시대의 세르반테스를 꿈꾸는 것일까.

  그럴듯한 이야기는 어차피 뻥이다. 창 대신 펜을 든 돈키호테라면 풍차를 향해 이렇게 외치지 않았겠나.

  다시, 가자! 로시난테여! 제대로 뻥 터뜨릴 때까지.(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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