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오래된 그늘/ 이영광

톰소여와허크 2012. 2. 13. 15:28

 

사진 출처 http://cafe.daum.net/leejh33 이재현님

 

오래된 그늘/ 이영광

 

 

늙은 느티의 다섯 가지는 죽고

세 가지는 살았다

푸른 잎 푸른 가지에 나고

검은 가지는 검은 잎을 뱉어낸다

 

바람이 산천을 넘어 동구로 불어올 때

늙은 느티의 산 가지는 뜨거운 손 내밀고

죽은 가지, 죽은 줄 까맣게 잊은

식은 손을 흔든다

 

한 사나이는 오래된 그늘에 끌려들어가

꼼짝도 않고

부서질 듯 생각노니,

나에게로 와서 죽은 그대들

죽어서도 떠나지 않는 그대들

 

바람神이 산천을 넘어 옛 동구에 불어와

느티의 百年 몸속에서 윙윙 울 때

 

 

- 『그늘과 사귀다』, 중앙북스(주)

 

 

 

* 나무 아래 서면, 그것도 오랜 풍상을 겪은 나무 아래 서면, 거기에다 바람까지 불어와 나뭇가지와 잎을 흔들어 놓기라도 한다면 나무가 전하는 말을 들을 가능성이 크다. 그 말이란 게 나무의 문제라기보다는 내면에 억눌려 있던, 이미 알고 있지만 바깥으로 끄집어내지 못했던 자신의 문제란 걸 경험적으로 안다.

  어떻게 보면 자신의 그늘에 속한 것을 큰 나무의 그늘을 빌려 서늘하게 인식하게 된다고도 볼 수 있겠는데, 이 시에서는 ‘죽음’과 그로 인한 상처나 그리움이 연상된다. “다섯 가지는 죽고/ 세 가지는 살았다”에서 보듯이 죽음은 자연스런 귀결이다. 하지만 살아남은 자의 관점에서 보면 죽음은 결코 무상할 수 없는, 존재를 뒤흔드는 고통이기도 할 것이다.

  삶과 죽음이 현상적으로는 섞일 수 없으나, “죽어서도 떠나지 않는 그대들”과 같이 삶이 죽음의 한쪽을 껴안고 가는 것도 이상할 건 없다.

  죽은 가지와 산 가지를 함께 흔드는 운명 같은 “바람신”을 통해서 생사가 이원적으로 분리되는 것이 아님을 거듭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잎을 피워야 하는 것은 “산 가지”의 몫임을 부인할 수 없다.(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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