꿘투 / 이장근
관장님께 권투는
권투가 아니라 꿘투다
20년 전과 바뀐 것 하나 없는 도장처럼
발음도 80년대 그대로다
가르침에도 변함이 없다
꿘투는 훅도 어퍼컷도 아니라
쨉이란다
관중의 함성을 한데 모으는 KO도
쨉 때문이란다
훅이나 어퍼컷을 맞고 쓰러진 것 같으나
그 전에 이미 무수한 쨉을 맞고
허물어진 상태다
쨉을 무시하고
큰 것 한 방만 노리면
큰 선수가 되지 못한다며
왼손을 쭉쭉 뻗는다
월세 내기에도 어려운 형편이지만
20년 넘게 아침마다 도장 문을 여는 것도
그가 생에 던지는 쨉이다
멋없고 시시하게 툭툭
생의 문을 두드리는 것이다
도장 벽을 삥 둘러싼 챔피언 사진들
그의 손을 거쳐 간 큰 선수들의 포즈도
하나같이 쨉 던지기에 좋은 자세다
- 『꿘투』, 삶이 보이는 창, 2011.
* 80년대 권투는 내게도 [꿘투] 내지 [껀투]였다. 발음이 왜 그러느냐는 면박을 받고 슬그머니 [권:투], 아니 [건:투]로 돌아섰지만 그 전의 등등한 기세는 푹 꺾이고 말았다. 공교롭게 권투가 사양길로 접어든 것도 그 무렵부터다.
쨉이 중요하다는 관장의 가르침은 권투를 조금만 안다면 상식에 지나지 않는다. 쨉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건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르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내가 아는 지난날의 챔피언들은 야단스럽게 쨉을 날리지는 않았다. 쨉은 접근전보다 거리를 확보하고 상대의 공격을 차단하는 수비적 수단으로 훌륭했기에 주로 약자의 무기로 유효해 보인다. 강력한 훅과 스트레이트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쨉으로 시작하는 선수가 있다면 적으로 만나지 않는 게 상수일 것이다.
결코 우호적일 리 없는 세상을 향해 “그가 생에 던지는 쨉”도 견제용이긴 마찬가지다. 쨉을 계속 뻗지만 세상은 끄덕도 없다. 오히려 그가 예상하거나 예상치 못한 곳에서, 세상이 무수한 쨉을 날리고, 또 날릴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이제 그는, 또 그와 별반 다르지 않은 서민은 막바지에 몰려 수건을 던지거나 바닥에 눕게 될 마지막 쨉 앞에 놓여있는지도 모른다.
[꿘투]가 아니라 [권:투]가 맞다고 쨉을 맞았을 때, 우리 동네에서는 [꿘투]가 맞다고 맞쨉을 놓지 못한 게 지금 와서 살짝 분하다. 새도우 복싱을 해보지만 내가 내미는 쨉도 주위의 평범하고 못난 사람들이 그러하듯 항상 늦거나 조금씩 짧다. 쨉을 견딜 최소한의 맷집이 현실이라면 반격의 어퍼컷은 꿈이다. 오늘도 “쨉 던지기에 좋은 자세”만 연습한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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