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단풍 / 황연진
작년 봄 당단풍 한 그루를 샀다
연녹색 잎들이 허공에 울리고 있었지만
가을 겨울이 지나도록 뿌리는
엉거주춤 화분 흙 위에 구부러져 있었다
베란다를 열면 까칠한 눈썹이 떨리곤 했다
나는 짐을 여러 번 쌌다 풀었다
저녁으로 밤으로 나가서 낙엽과도 자고
빗줄기를 끌어안고 흰 눈과 긴 입 맞추기도 했다
가방에 옷을 넣고 세면도구와 문서와 화장품들을
넣었다가 뺐다가 도로 간추리면서
날이 풀리면
날이 풀리면 하며 창밖을 보았다
다시 봄이 다가온 저녁
감기약에 취해 멍하니 바라 본 베란다에
시퍼런 당단풍 한 그루 날 쏘아보고 있다
아주 팔짱을 끼고 앉아 싱싱한 잎들을 펼쳐놓고 있다
내가 창으로 새어 나갈 때마다
그는 잎을 하나씩 가슴에 매달았었나 보다
싸다 만 짐을 추리며
나는 당장 어디로 빠져나갈지 두리번거린다
- 『달콤한 지구』, 도서출판 지혜, 2012.
* 시를 읽고 나니, 예전에 읽은 소설 두어 편이 스친다. 기억을 더듬어 검색해 보니, 한강의 《내 여자의 열매》와 은희경의 《아내의 상자》다.
《내 여자의 열매》는 세상 끝을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싶은 여자가 자신의 꿈을 접고 가정과 사랑을 선택했지만 끝내 적응하지 못하고 식물로 변해 간다는 이야기다. 《아내의 상자》에 나오는 아내 역시, 남편으로부터 이해받지 못하고 시설에 맡겨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소설 속 두 여자의 삶은 일상의 시선, 즉 익숙하고도 평범한 그렇지만 가부장적 윤리가 가미된 시선에서 보자면 그다지 특이할 게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가까운 사람도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그녀들의 삶은 위태로웠고 안으로 조금씩 시들어 말라가고 있었다.
위 시에서 “짐을 여러 번 쌌다 풀었다”하는 일은 자신의 공간과 그 안에서의 역할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과 틀에 박혀 공고화된 삶으로부터 자신의 존재를 찾으려는 또 다른 마음이 충돌하고 있는 상황으로 읽힌다. 일상에 젖어 있는 삶이 겉으로 평화로울지 모르나 자아의 가능성을 잡아두는 족쇄이기도 할 것인데 그럼에도 선택이 어려운 것은 하나를 가짐으로써 다른 하나를 내려놓아야 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안주와 모험, 익숙한 것과 새로운 것, 이것과 저것 사이에 갈등하고 고민하는 일 자체는 존재의 의미와 참된 자아상을 찾으려는 예술가의 기질과 닿아 있는 부분이며, 그 고뇌가 깊다는 것은 당단풍 푸른 잎처럼 살아있다는 표시일 것이다.(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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