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종사 무료 찻집 / 박몽구
만만한 평지 다 버리고
누가 나서서 하필이면
마파람 한 올에도 까치집처럼 흔들리는
가파른 산꼭대기에 절집을 틀었을까?
황토 먼지로 한치 앞 아득한 산길 오르며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게
사람 몸인 줄 비로소 알 것 같다
한 생애 마친 듯 산길 굽이돌며
등과 배꼽이 맞붙는 적막학 식욕
눈앞에 비틀거리는 아지랑이 어른거려서야
깨진 기왓장 위에 민들레 무성한 산문
빼꼼하게 귀 내민다
이제, 돌아갈 아득한 길 달래며
봄가뭄 걱정에 잠 못 이룬 채 모로 누운
정약용 유택 훤히 내려다보이는
수종사 무료찻집에서 봄볕을 부신다
찰랑거리는 찻물 따라 흔들리는
서어나무 마른 잎새에서
두물머리의 상처를 읽는다
남녘 칠백리 북녘 삼백리
한 걸음 헤쳐 나갈 때
돌부리에 핏빛 어깨 맡기고
두 걸음 나갈 때
뱃가죽에 뜨겁게 온몸 실어
막힌 길 한쪽을 터왔다고
정약용 목민심서 책장 넘기는 소리 빌어 귀띔해 준다.
저렇듯 빛깔과 몸피가 다른 강줄기들도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져 줌으로
몸 활짝 열어 하나가 되는 것
눈물겹지 않느냐고
봄물 절 마당에 백 지게쯤 풀어놓는다
상처라곤 속으로 감춘 채 서울로 치닫는 강줄기
거저 굵어진 줄 알고
둑 터지듯 빈말 마구 뱉은 뒤
등 돌린 선거철 공약 다 안고 서해로 간다
금방이라도 세상을 바꿀 것 같은 큰소리들
한낱 포말 되어 흩어지는 산 아래를
부스럼을 다스리러 왔다가 들른 세조가 심었다는
오백 살 은행나무가 굽어보고 있다
새로 돋은 잎으로 적신 저녁놀 한 잔 마신다
- 『수종사 무료 찻집』, 시와문화,
*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를 한눈에 조망하는 위치에 수종사가 있다. 정약용이 어린 시절과 유배 해제 후 말년을 보냈던 곳이 지척에 있으며 그의 무덤 자리도 절 아래 있다. 목민(牧民)의 마음(心)은 컸으나 목민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던 시절, 그의 삶만큼 가파른 이곳을 정약용이 자주 들렀다고 한다.
수종사 무료 찻집에 앉은 시인은 먼데 눈을 주면서 강줄기를 봤을 테고 “막힌 길 한쪽을 터왔다”는 점에서 정약용의 삶 역시 강줄기를 닮았다고 생각했을 법하다. 하지만 강줄기는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져 줌으로/ 몸 활짝 열어 하나가 되는 것”이지만 남의 상처를 예사로 볼 경우 “빈말”과 “큰소리”를 내다가 쉽게 사그라지기도 하는 것임을 생각하게 한다. 수종사에 인연이 닿으면 은행나무 아래로 가야겠다. ‘그윽한 만날 약속 어찌 다시 그릇 되리’(幽期寧再誤 - 정약용의 <游水鐘寺>에서)를 읊으며 “저녁놀 한 잔” 나누어 마신다면 더없이 좋을 것이다.(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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