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두세배/ 신순임
토담에 기댄 앵두나무
흰 눈 바가지로 움푹 쓰고 있다
한 울타리 안의 대소가 쩌렁쩌렁 안채 울리며
고방(庫房) 열어 들락날락
디딜방아는 쿵더쿵쿵더쿵
지정(至精)간 도타운 정분 밤낮 잊고 이어질 제
속절없는 고향 생각 말을 삼킨다
껑껑 얼어붙는 설거지통 피웅피웅 울어 보채고
생나무 태우듯 아린 가슴
다듬잇돌로 꾹꾹 누르는데
백년손님 행차 요란한 정초부터
달을 넘긴 세객들 발걸음
백구가 먼저 나가 반긴다
앵두가 빨갛게 익어야만 갈 수 있는 친정나들이
꿈같이 나설 걸음 아득하고
어버이 안전에 내놓을 앵두는
가슴에서 익는다
물러 익은 생채기에 단 눈물이 흐르고
*지정(至精): 가까운 친척
- 『앵두세배』, 청어, 2013.
* 양동 무첨당(無忝堂) 종부의 시다. 정초부터 대소가 친척들과 손님들을 접대하는 일이 여간 일이 아닐 것이다. “피웅피웅 울어 보채”는 설거지통에서 정신없이 핑핑 돌아가는 화자의 상황과 고달픈 심사가 읽히는데, 거기에 더해 “아린 가슴”이 된 것은 이 집 사위(백년손님)는 살갑게 맞이하면서도 정작 본인은 친정에 가지 못해서다.
집안일을 맡아 하는 수고로움은 “도타운 정분”을 나누는 것으로 위로가 될지 모르겠지만 그럴수록 마음 한구석에는 고향과 부모를 그리는 정이 오롯했을 것이다.
처가 세배는 앵두 따서 간다든지, 앵두꽃 필 때 간다든지 하는 말은 처가를 멀리하던 유교 문화에서 나온 말일 것이고, 더러 늦게 세배 가는 쪽을 합리화하는 구실이 되곤 했다. 지역 문화나 종가의 특성상 화자는 해마다 “앵두세배”를 해왔을 테니 그간의 기다림으로 마음을 폭폭 끓였을 줄 짐작이 된다.
“어버이 안전에 내놓을 앵두”는 딸자식 자신임을 생각한다. 일찍 설익어 가든, 늦게 물러서 가든 어떤 선물보다 값진 앵두! 머지않아 익겠다.(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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