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량역 / 한영채
고요하다 사월 무논 같은
간이역
뒤란 왕벚꽃 무성한 소문같이 꽃비 내리던
낮은 담벼락
차르르 쌓인 그 소문, 꽃비 되어
떠나보낸 대합실
말더듬이 역장의 붉은 깃발과
새벽 호각소리 멈춘 어스름 달빛
운동화 이슬에 흰 코 적시며 논길 걷던,
대구행 비둘기호 출발선
모량건천아화임포영천하양청천반야월
손가락 세며, 미루나무 세며
더듬어 보는 옛길
단석산 그리매 아직도 안녕한지
철길 위에 부려 놓는
시큰한 간이역.
- 『모량시편』,계간문예, 2012.
* 겨울 사평역(곽재구 作)이 눈꽃과 톱밥 난로로 쓸쓸하고 고단한 삶을 위로했다면, “왕벚꽃 무성한” 봄 모량역은 긴 터널을 지나온 손님에게 환한 햇살을 안겨 줄 것만 같다.
박목월 시인의 고향으로 알려진 마을이라서 그런지, 풍경의 매력 때문인지 모량역은 박해수, 문인수, 박곤걸 시인에 의해서 시로 창작된 바 있고, 여기에 더해 “사월 무논 같은”, “꽃비 내리던”, “말더듬이 역장”이 있는 역으로 새롭게 그려낸 시인은 이 고장 출신이다. 시인은 예서 자라서 꿈을 좇아 도시로 나갔다가 귀향하곤 했을 것이다. 지금도 왕벚꽃은 인사를 차리는지, 말더듬이 역장은 조금 더 늙어서 안녕하신지, 오가며 보던 미루나무는 아직도 헤아릴 만한지 궁금해진다.
검색해 보니 모량역은 더 이상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는단다. 벌써 예전의 모습을 많이 잃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시인에겐 여전히 “시큰”하게 와 닿는 역이다. 이제 겨우, 시인은 안도하고 있을 것이다. 이 한 편의 시로 모량역과 추억을 도둑맞을 일 없이 한꺼번에 사 두었으니.(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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