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초피나무 아래서 / 권영부

톰소여와허크 2013. 3. 20. 11:43

 

초피나무 (사진 출처: http://cafe.daum.net/sungwy2005 성우영님 작)

 

초피나무 아래서 / 권영부 

 

늙은 감나무 잔가지가

얼기설기 그늘을 만드는 텃밭 어귀의

초피나무 한 그루

그 곁에만 가도 싸하다, 싸해

 

싸한 잎사귀에 몸을 비빈 노린재는

아무도 범접 못할 향을 얻어 남보란 듯 날아가는데,

저 놈의 황가리도 안추르며

가시 사이를 잘도 기어가는데,

 

그대 곁에 오래오래 머물면

그대의 사랑이 짙게 밸까

 

그리하여 싸한 구석도 안아줄 수 있을까

 

그러저러하다가

초피나무 가시에 등허리를 들이밀지만

결국은 움찔, 하고 만다

- 『자목련이 질 때면』, 북인, 2009.

 

* 초피나무는 톡 쏘는 매운 맛의 열매(초피 또는 제피)를 갖고 있다. 그래서 민물고기의 비린내를 없애는 향신료로 많이 사용한다. 잎도 김치로 담가 먹는데 자극적인 맛이 열매 못지않다.

  독한 데다 단단한 가시까지 있으니 접근이 쉽지 않은데 노린재와 황가리(족제비)는 초피나무 곁을 무탈하게 오고 간다. 어린왕자가 여우를 길들여 친구가 되듯 초피나무에게 길들여지면 독을 뿜지도 않고 가시를 세우지도 않고 “싸한 구석”을 서로 껴안을 수 있겠다 싶었겠지만 시인의 기대는 싱겁게 좌절된다. 쉽게 떨어질 가시가 아니었다. 또 생각해 보면, 가시가 있고, 그로 인해 적당한 간격이 주어지는 게 서로에게 좋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가시는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함부로 가서 다치는 일이 없도록 상대를 주의시키는 기능도 하기 때문이다.

  가시의 안쪽을 섣불리 넘보고 잰 대가로 가시침 한 대는 달게 맞아야겠다.(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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