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외 문인 일화

소동파(蘇東坡, 1036~1101, 쓰촨 성 미산(眉山)현 )

톰소여와허크 2013. 6. 2. 19:13

소동파(蘇東坡, 1036~1101, 쓰촨 성 미산(眉山)현 )

아래는 정윤수 님의 글입니다.

 

[ 내 친구는 ‘김치찌개’가 김치를 넣고 끓인 찌개라는 식으로 중국 음식 이름을 해례했다. 예컨대 내가 즐겨 먹었던 ‘삼선 짬뽕’은, 3선 즉 해삼, 새우, 고기를 더한 짬뽕이었다. 보통 탕수육 할 때의 그 육은 현지 발음으로 ‘루’(肉)인데 이렇게 ‘고기 육’ 한 글자만 들어간 요리는 돼지고기 요리로 중국 사람들에게 고기란 바로 돼지고기를 뜻한다고 했다. 톈지(田鷄)는 개구리, 펑(鳳)이나 지(鷄)는 닭고기, 샤(蝦)는 새우 종류가 된다. 피옌(片)은 얇게 썰어 만든 모양이고 모(末)는 아주 잘게 썬 모양이며 쓰(絲)는 결을 따라 가늘게 찢은 모양의 음식이다. 흔히 기스면이라고 부르는, 지쓰몐(鷄絲麵, 계사면)의 ‘쓰’가 이것이다.

 

원재료와 양념과 그 모양과 요리 방식을 이러 저리 조합하여 보면, 깐풍기(乾烹鷄)는 튀긴 닭고기를 매콤한 소스로 볶은 요리가 되고, 깐풍육은 닭 대신 ‘고기’ 즉 돼지고기를 쓴 요리다. 라조기(辣椒鷄)는 고추를 넣어 맵게 만든 닭 요리, 난자완스(南前丸子)는 기름을 적당히 두르고 부친 완자, 아이들 좋아하는 탕수육(糖醋肉)은 설탕(糖)과 식초(醋)로 맛을 낸 돼지고기 요리다. 아, 샥스핀은 shark's fin, 즉 상어지느러미 요리라고 들었다.

 

내가 또 하나 물었다. 불그죽죽한 메뉴판의 아래쪽에 ‘동파육’은 무엇이냐고? 그 동파가 저 동파냐고? 송대의 시인과 관련 있는 요리냐고 물었다.

 

그는 그렇다고 말하면서, 이 동파육에 얽힌 고사와 유래가 많은데, 미식가였던 소동파가 돼지고기를 나름 색다르게 처음 했더니 소문이 나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 설까지 포함하여, 현지 발음으로 ‘둥포러우(東坡肉)’가 되는 ‘동파육’의 ‘정설’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고 했다.

 

송대 원우 4년, 즉 1089년에 소동파는 후베이(湖北)성의 벽촌 황저우(黃州)에 유배를 살고 있었다. 44살 때의 일로 암울한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이 황저우에 서호가 있어 중국 역대 시인들이 그러하였듯이 소동파도 서호를 산보하며 많은 시를 썼는데, 시 ‘비 개인 호수에서 술을 마시다’에서는 ‘경국지색’의 서시에 비유한 적 있다. 서시가 화장을 했을 때나 안 했을 때나 천하일색 미인이듯이, 서호 또한 ‘은빛 물결 출렁일 때나 운해에 가려 천지가 몽롱할 때나’ 천하의 절경이라고 읊었다.

 

바로 그 서호를 치수할 일이 생겼다. 소동파는 항주의 백성들과 함께 서호의 방제 작업을 함께 하여 오랜 고생 끝에 그것을 성공시키게 되었다. 힘겨운 공사를 끝낸 백성들이 집집마다 돼지를 잡으며 잔치를 하게 되었고 이때 소동파가 돼지고기에 소흥 술로 적절히 졸인 고기 요리를 선보이며 백성들과 한 때를 더불어 지냈다는 것이다.

 

소동파는 이 요리를 위하여 시까지 지었다고 한다. “질 좋은 돼지고기는 아주 싼값이지만 잘 사는 사람은 먹으려 하지 않고 가난한 사람은 삶지를 못하는구나. 물을 적게 넣고 약한 불로 삶으면, 다 익고 나서 스스로 제 맛이 나누나."

 

그 이후 이 일대에서는 돼지고기와 소흥 술을 원료로 하는 돼지고기 요리법을 ‘동파육’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이 요리가 황저우 지역 경제를 되살려냈다고도 한다. 이곳 사람들은 동파육뿐만 아니라 동파완자(丸子), 동파금각(金脚), 동파사자두(獅子頭), 동파수구(繡球) 등 여러 돼지고기 요리에 동파라는 이름을 붙였다.

 

소동파는 산해진미를 찾아 나서는 재력 있는 탐미가는 아니었지만, 오랜 세월 동안 천하의 절경 속에 깃들어 살아낸 백성들의 일상적인 음식을 진심으로 즐겼던 미식가였다. 그는 시 ‘사월 열하룻 날 여지를 처음 먹고’에서 “살 조개를 쪼개어서 육주를 떼놓은 듯 / 복어를 씻어서 뱃살을 삶아놓은 듯 / 입을 위해 이 세상을 두루 다녀보았건만 / 벼슬 재미 예전부터 / 순채국과 농어회를 따라가지 못했네”라고 쓴 적이 있다.

 

아무튼 그랬던 일이 장강의 역사와 물줄기를 따라 이곳저곳으로 번지게 되어, 무려 1천 년이 흐른 뒤에도 연남동의 어느 중국집에서는 어리숙한 두 사내가 간짜장에 삼선 짬뽕 시켜 놓고는, 언필칭 동파육을 논하고 있었던 셈이다.

 

바로 그 소동파가 1036년의 오늘, 12월 19일에 태어났다. 약 1천 년 전 사람의 생몰 연대가 이토록 정확하게 남아 있기란 쉽지 않은데, 아무튼 그는 1101년 7월 28에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동파의 이름은 식(軾). 아버지 소순(蘇洵), 아우 소철(蘇轍)과 더불어 ‘삼소(三蘇)’라 불리는데, 흔히 당송 팔대가(唐宋八大家)라고 존숭할 때 이 세 사람이 동시에 들어간다. 여동생으로 소소매(蘇小妹)가 있는데, 이 사람 또한 문재가 뛰어나서 시구에 한 글자씩 더하거나 바꿈으로써 시 전체의 뜻이 전도되는,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전하고 있다.

 

소동파는 1069년에 진사에 급제하였다. 당시 심사위원장이 역대 최고의 문장가로 통하는 구양수(歐陽修)였다. 소동파는 역시 당송 팔대가의 한 사람인 왕안석(王安石)의 신법 정책에 반대하였다가 지방의 한직으로 떠돌거나 유배를 당하였다.

 

오늘 이 블로그의 주인공이 소동파라고 해서 왕안석이 주도한 신법을 함부로 논해서는 위험할 것이다. 왕안석의 신법(특히 청묘법)은 국가 재정의 확보와 행정 효율성 증대라는 측면에서 큰 성과를 거뒀으나 중소 상인과 농민층의 몰락(?)을 가져왔다고 하는데, 이 같은 왕안석의 정치 개혁과 이에 대한 당시 여러 지식인의 대응은 오늘의 블로그에서 감당할 만한 범주를 넘어선다.

 

과거 시험에 급제한 소동파였지만 정치적으로는 제 뜻을 펴지 못한 지식인이 되었고, 이런 이유로 소동파는 틀에 박힌 시와 문장과 사유를 거절하며 철저히 개성적인 시의 세계를 추구하였다. 동생 소철, 아들 소과, 제자 황정견 등에게도 일체 자신의 시와 문장을 모방하려고 하지 못하도록 가르쳤다.

 

소동파는 ‘덕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말을 한다’는 공자의 말씀에 대하여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덕이 입으로 튀어 나오는 것’이라고 주해하였는데, 바로 이것, 즉 어떤 사물이나 느낌이나 기운이 적절한 상태 이상으로 넘쳐흐르면서 터져나오는 것을 소동파는 지향하였다. 정해진 규칙에 따라 이리 저리 문장을 다듬고 여러 말을 넣었다가 뺐다가 하는 게 아니라 오래 숙성된 어떤 사유(덕)가 시어를 입어 터져 나오는(말) 상태를 동경했다.

 

그는 <‘남행전집서>(南行前集敍)’에 다음과 같이 썼다.

“대체로 옛날에 지은 글들은 글을 짓는 능력이 뛰어나서 훌륭하게 된 것이 아니라 글을 짓지 않을 수 없게 된 다음에 지어서 훌륭하게 된 것이다. 산천에 구름과 안개가 있고 초목에 꽃과 열매가 있는 것은 그 속이 꽉 들어차서 그것이 자연스럽게 밖으로 드러난 것이다.”

 

‘글을 짓지 않을 수 없게 된 다음에 지어서 훌륭하게 된 것’을 지향한 소동파의 세계는 변방의 관직이나 유배의 삶을 살면서 자연스럽게 체득된 것이다.

 

그는 자신을 천거했던 구양수가 ‘곤궁한 처지에 놓인 뒤에 비로소 시가 아름다워진다’고 했던 바를 몸소 겪으면서 ‘옷과 음식이 나쁠수록 시 더욱 좋아지니, 서리 맞은 소나무에 봄새가 우는 듯’이라고 했다. 이 거친 음식과 옷의 비유는 단순한 경제적 궁핍만이 아니라 정치적인 격변에 따른 유배의 삶, 그리고 가난한 백성의 일상까지 함께 생각하는 바를 포함한다.

소동파에게 시와 음식은 모두 오랫동안 숙성하여 터져 나오는 어떤 것이다. 그는 시에 대하여 ‘만 섬이나 되는 많은 샘물이 땅을 가리지 않고 여기저기서 마구 솟아’ 나오는 것이라고 썼고, 앞에 소개하였듯이 ‘물을 적게 넣고 약한 불로 삶으면, 다 익고 나서 스스로 제 맛이 나누나’ 라고 황저우의 돼지고기, 즉 동파육을 노래한 적 있다.

‘다 익고 나서 스스로 제 맛’을 내는 경지, 그것이 소동파의 문장 세계라고 하면 지나친 비유일까. 소동파는 1079년에 왕안석의 신법을 풍자한 시로 탄핵을 받아 옥에 갇혔다가 겨우 살아남아 황저우로 유배를 당했다. 탄식하며 지내는 그를 안타깝게 여긴 친구 마몽득이 관아에 허락을 받아 1082년에 옛 군사 주둔지를 소동파에게 얻어주었다. 황저우의 ‘동쪽에 있는 황무지’, 곧 ‘동파’를 개간한 이후에 소동파는 스스로를 ‘동파거사’라고 불렀다. 소동파는 그렇게 나온 이름이다.

 

이 시절에 그는 황저우를 소요하면서 그 유명한 <적벽부>(赤壁賦)를 지었으니, 그 한 구절, 우리에게는 큰 바다에 던져진 좁쌀 한 톨, 즉 창해일속(滄海一粟)라는 사자성어로 기억되는 대목을 아래에 옮겨본다. 참고로 이제까지의 문헌이나 시의 해석은 <여산진면목>(솔, 류종목 번역)을 참고하였으나 아래는 신영복, 기세춘 번역의 <중국역대시가선집>에서 옮긴 것이다.

 

駕一葉之輕舟 擧匏樽而相屬

寄蜉蝣於天地 渺滄海之一粟

 

오늘 일엽편주를 타고 표주박 술을 서로 권하는

천지에 하루살이요 창해에 한 톨의 좁쌀이로다.

 

哀吾生之須臾 羨長江之無窮

挾飛仙以遨遊 抱明月而長終

 

덧없는 우리의 삶을 슬퍼하고 강물의 무궁함이 부러워

신선들과 하늘을 날며 자유로이 노닐다가 명월을 품고 여생을 마치려 하나

 

知不可乎驟得 託遺響於悲風

 

달려가 잡을 수 없음을 알고

쓸쓸한 바람에 보잘것없는 노래를 띄웠노라 ]

 

아래는 김혁 님의 글입니다.

[석학 인문강좌 중국 북송(北宋)시대 시인이었던 소동파(蘇東坡, 1036~1101)는 고려, 조선시대를 이어가면서 한국인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다. 도연명, 두보, 백낙천, 황정견 등 필명을 날리던 많은 중국 시인들의 작품이 한반도에 전해졌지만, 소동파만큼 인기를 끌었던 시인은 없었다.

이혜순 이화여대 명예교수(국문학)는 10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린 석학과 함께 하는 인문강좌를 통해 ‘동파 열풍’이 가장 컸던 시기는 고려에 무신정권이 들어선 1170년에서 약 1세기가 경과한 후였다고 말했다.

이규보(李奎報, 1168~1241)는 전주에서 간행한 동파집(東坡集) 서문에서 “동파집처럼 사람들이 즐긴 책은 과거에 없었다”면서 “대부로부터 신진 후학에 이르기까지 잠시도 그 책을 손에서 놓지 않고, 그가 남긴 향기를 즐기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당시 문사들이 동파의 시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말해주는 대목이다.

주자학을 집대성한 남송시대 주희(朱熹, 1130~1200)는 소동파의 인품, 배경, 사상 등이 유가의 군자답지 못하고, 그의 문학이 비유가적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소동파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자학의 나라 조선에서 소동파의 인기는 여전히 폭발적이었다. 이황(李滉, 1501~1570)과 같은 학자는 “소공의 문장은 훌륭하고 아름다워 근세에 짝이 없다. 만약 글을 짓고자 한다면 모범으로 삼아도 해될 것이 없다”고 칭찬했다. 조선 조정에 의해서도 소동파문집의 주해, 간행, 교주(校註) 등의 작업이 이어졌다.

논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조선시대 문신인 심수경(沈守慶, 1516~1599)은 그의 수필, ‘청천견한록(聽天遣閑錄)’에서 “내가 어렸을 때는 고시를 학습할 때 모두 한퇴지와 소동파의 시를 읽었고, 이는 예부터 내려온 일이었는데, 근년의 선비들은 한퇴지와 소동파의 시는 비근하다 하여 읽지 않고, 이태백과 두자미의 시를 취하여 읽는다”고 우려했다.

그러나 조선 중기 학자, 문인, 정치가였던 허균(許筠, 1569~1618)은 그의 시화집 ‘학산초담(鶴山樵談)에서 “문사들이 여전히 소동파와 황정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 같은 상반된 주장은 소동파의 자리가 약화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지만, 적어도 소동파 문화가 조선 선비들의 삶 속에 들어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 교수는 고려,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선비들이 소동파 시에 빠져든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특히 소동파의 자유스러운 삶에 대해 이해가 깊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조선 중기 문인, 정치가였던 신흠(申欽, 1566~1628)은 그의 시 독동파우서(讀東坡偶書)에서 “지금까지 수백 년이 지났건만 그 호기 없어지지 않았네...”라며 동파가 진퇴 사이를 초월했고, 부귀를 뜬구름처럼 여겨 상관하지 않았음을 높이 평가했다.

 

특히 장강(長江, 양쯔강)에 배를 띠워 적벽을 선유하면서 지은 시로 알려진 ‘적벽부(赤壁賦)’는 조선 문사들이 체험해보고 싶은 탈속적인 풍류의 모범으로, 그 문장만이 아니라 정신과 풍류 모두 선망의 대상이 됐으며, 해마다 음력 7월 기망(열엿샛날) 때면 소동파의 적벽강 놀이를 주제로 해서 시를 짓는 소동파 문화가 형성돼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동파는 자신을 사랑했던 고려에 대해 매우 적대적인 감정을 갖고 있었다. 북송을 찾아온 고려 사신들과 관련해 그가 북송 조정에 올린 상소문, ‘논고려진봉장(論高麗進奉狀)’에 의하면 극도의 개인적인 편견을 보여주고 있다.

고려 사신의 접대를 위해 사관을 짓고 배를 만드느라 농민과 어민, 상인들을 소란스럽게 하고, 모두 병이 날 정도여서 조정에는 조금의 이득도 없는데, 오랑캐들은 셀 수 없는 이득을 얻는다고 고려에 대한 적대감을 그대로 표출하고 있었다.

 

몇 년이 지난 후에는 또 상소문을 올려 고려 사신들의 서적 구매를 허락하지 말아달라는 청원을 하고 있었는데, 이는 요(遼)나라가 북송을 치기 위해 북송과 우호관계에 있는 고려를 공격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그의 편협한 국제정세관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11~12세기 고려는 송에 대해 정치적인 사대관계로만 볼 수 없는 지극한 존경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고려 문사들은 공자와 맹자의 시대를 체험하는 느낌을 가지면서, 그 시대의 의례와 군자에 대한 그리움, 애정과 경모를 송에 대입시키고 있었다.

이 같은 분위기 속에서 소동파의 호방한 시가 고려에 전해지면서 당시 무신정권의 탄압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고려 문신들의 큰 관심을 끌었다고 말했다. 또한 그의 불교, 노장의 대한 시문, 유배, 좌천 등으로 점철된 그의 일생이 알려지면서 소동파 열풍으로 이어졌는데, 고려에 적대적인 소동파를 고려인들이 짝사랑한 셈이었다.

 

이 교수는 고려, 조선시대로 이어진 소동파 열풍이 한국 문학에 끼친 영향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크다고 말했다. 그러나 너도나도 소동파 작품을 표절하는 부작용도 심각했는데, 어찌 보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표절 논란의 뿌리가 소동파 열풍에 있었던 것처럼 추측되기도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