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꼬 보러 갔다가 / 최재경
여우비가 슬그머니 다녀간 대낮에
거반 말랐던 빨래가 축 늘어져 있다
말매미 쓰르라미가 악을 쓰고 울어대고
산여치도 덩달아 찌직거리고 있다
집에 온 딸아이는 봉숭아 꽃잎을 모아
콩콩콩 여름을 빻고 있다
텃밭에 키 큰 옥수수수염이 붉고
오므렸던 도라지꽃이 폭폭 터진다
늘어지게 낮잠이나 자려다가
며칠 안 가본 논이 궁금하여 삽을 들고 나선다
논두렁을 걸어가는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뜨건 날 피사리하던
마을 동생이 부른다
어디에 가든 늘 숨겨논 술이 있어
오늘은 어디에서 나오나 봤더니
논 수멍머리에서 소주 한 병을 들고 나온다
형님 미지근한 술은 못먹유
이래 봐도 시아시 하나는 끝내준당께요
논물이나 봇물이나 미적지근하기는 매한가지인데
허풍이 대단하다
반병씩 노나 먹고 일어서는데
수리봉 하늘이 수상쩍다
들판으로 우르르 천둥이 친다
찬바람이 뜨신 바람으로 불어온다
소나기가 퍼붓는다
채찍비가 얼굴이고 등짝이고 후려친다
피할 도리가 없다
어떤 놈 소행인지 묶어논 풀에 발이 걸려 꼬꾸라졌다
옷 입은 채로 물속에 뛰어든다
고무신이 떠내려갔다
까진 팔꿈치에 피가 난다
물꼬 보러 간다는 풍신이 중얼중얼 돌아온다
호랭이만 신명나게 서너 번 장가 간 날이었다
- 『솔깃』, 시와에세이, 2013.
* 김유정의 <봄봄>, <동백꽃> 등을 읽고 있자면 수시로 배를 잡게 된다. 아예 남을 웃기려고 작정하고 글을 썼던 게 아닌가 싶다. 김유정 본인의 삶은 그렇게 웃음을 띨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는 말도 있고, 그렇게 웃고 지나는 가운데 농촌 사회의 모순이나 적나라한 실상을 잘 그려냈다는 평도 듣는다.
최재경 시인의 시에서 김유정의 향수가 난다. 특히, 의뭉하게 능청 떨면서 남을 웃기는 재주가 예사롭지 않다. 여우비가 다녀가면서 빨래를 새로 해야 할 상황이 웃음의 전초였다면, 물꼬 보러 갔다가 소주 한 병을 나누고 “채찍비”에 맞고, “발이 걸려 꼬꾸라”지고, “물속에” 빠졌다가 “고무신이 떠내려”가는 고투 끝에 “까진 팔꿈치에 피”까지 보는 활극이 절정이 될 터이고, 이 모든 상황을 호랑이 장가가는 오락가락한 날씨로 눙치면서 정작 본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시치미를 떼는 것으로 웃음은 완성된다.
웃기려고 해서 쉽게 웃어지는 건 아닐 텐데 시인의 의도대로 독자가 움직였다면 상황 전개의 그럴듯함과 함께 표현의 적실성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산여치도 덩달아 찌직거리고 있다”든지 “도라지꽃이 폭폭 터진다”든지 하는 표현 등은 실제 가까이 경험하면서 공을 들여 얻은 구절일 것이다. 남을 웃기는 데도 정성이 필요한 셈이다. 물꼬 보러 나갈 때 시인에게 고무신 대신 장화를 권하고 싶다.(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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