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격자 창살무늬 방 / 정연희

톰소여와허크 2014. 1. 15. 21:45

격자 창살무늬 방 / 정연희

 

 

할머니의 오래된 집에 도배를 하러 갔다

문틀은 뒤틀리고 창살은 군데군데 잘려나갔다

창호지에 구멍 내고 바라보던 바깥풍경도 빛바래고 찢어져서

창호지를 다 뜯어냈다

이제 남은 건 참나무 나무틀과 격자무늬 창들 뿐

저 참나무 격자무늬 문이 지고 있던 무게로 뒤틀어져

할머니의 등뼈처럼 휘어져 있다

격자무늬 칸칸마다 거미가 버리고 간 빈방이 있다

나는 귀얄로 그 방의 먼지를 털어냈다

격자창문 칸칸에 언뜻 스치는 걸 보았다

거기 봄 아지랑이 자욱한 아침나절

볕에 그을린 할머니가 닷새 장터 골목에 앉아 있다

해 저물녘까지 대소쿠리에 이고 온 찐 고구마가 그대로 수북하다

또 다른 방을 들여다보았다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으시는 할머니 목덜미가 하얗다

김이 자욱한 무쇠 솥에 구부리고 고치실을 건지고 있다

잊고 지냈는데

명치끝이 아려왔다

다시 둘러보니 그 방들은 사라지고 텅 빈 격자무늬 창살들……

이제 창호지 바르면 칸칸마다 다시 환한 방들이 들어찰 것이다

 

- 『호랑거미 역사책』, 종려나무, 2010.

 

* 할머니가 거주하던, 오래 비워두었던 빈집을 도배하면서 할머니에 대한 기억이 하나하나 살아났나 보다. 주인이 떠난 집은 문틀도 문짝도 예전의 할머니 등처럼 조금씩 휘어졌겠다.

  특히, 가로 세로 직각으로 잇대어 격자무늬(문살무늬)를 이룬, 작은 창들이 각각의 스크린이 되어 거기서 활동사진이 돌아간다. 그 영상은 아지랑이와 김이 자욱한 가운데 할머니의 신산한 삶이 겹쳐서 흐리고 뿌옇기만 하다. 하지만 그 안에 느껴지는 그리움은 깊고 슬픔은 맑다.

  창호지 바른 “환한 방”이 새로 영사막이 된다면, 그때의 영상은 깜빡 조는 그대를 위해 할머니가 햇살을 당겨 덮어주는 장면이지 않을까.(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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