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책방을 찾아서 / 구재기
헌책방에 들러
누군가 읽다가 버려 예까지 와버린
헌 시집 한 권을 샀다
정가의 오분의 일도 되지 못한 시집 한 권
왜 그렇게 싸냐고 물으니
요즈음 같은 때 시 같은 걸 누가 읽느냐
한 두어 편 읽다가 버리는 것이지요
당연하지 않느냐는 듯
헌책방 주인이 오히려 이상하게 날 바라보았다
시내버스 제일 뒷좌석에 앉아
떨떠름한 가슴을 열어 시집을 펼쳤다
누가 그랬을까?
사랑, 별, 햇살 등이 나오는 시 구절마다에
붉은 볼펜으로 굵은 줄이 그어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시집을 처음 펼쳤던 사람에게도
뜨거움이 있었던 게 아니겠는가
그렇구나, 그렇구나
한때의 뜨거움을 가진 자는 이렇게 버릴 줄도 안다
그 동안 어떠한 뜨거움도 없이
얼마나 많은 세월을 탕진하며 미적거려 왔던가
문득 나의 사랑과 별과 햇살이 부끄러워졌다
나는 그만 달리는 버스에서 내려
잊고 살아왔던 내 사랑과 별과 햇살을 찾아
다시 헌책방을 찾아서 힘차게 내달렸다
- 『가끔은 흔들리며 살고 싶다』, ㈜천년의시작, 2009.
* 헌책방 골목이 하나둘 사라지고 있다. 대형서점에 발목이 잡히더니 온라인 주문의 무기를 장착한 대형 중고서적에 숨통이 조이는 현실에 직면해 있다. 옛 골목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고 나름의 희귀본을 갖추어 경쟁력을 가지려는 노력이 눈물겨워 보인다.
헌책방에 있는 시집의 운명도 별반 다르지 않다. 싸게 내놓아도 사 보는 사람 없이 구석장이로 있으니 시나 시인에게 조금이라도 안면 있는 사람에겐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겠다. 겉은 낡아도 안은 그렇지 않을 텐데 대우를 못 받는 처지가 쓸쓸할 것이다.
시인이 펼친 헌 시집엔 그전의 독자와 교감했던‘사랑과 별과 햇살’이 밑줄로 그어져 있다. 사랑과 별과 햇살을 온전하게 그릴 수 있는 마음, 그 뜨거움이 살아나는 걸 시인은 감지한다. 그동안 의식에서 자신도 모르게 억압해 왔을 욕망으로 인해 삶이 미적거리게 되고, 희미해진 열정만큼이나 삶이 시들했을 텐데, 헌 시집을 조우하면서 새로 깨어나는 순간을 맞는다. 그러니 ‘헌’ 시집이란 말, 이제부터는 함부로 쓰지 못하겠다.(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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