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물푸레나무 / 온형근

톰소여와허크 2014. 1. 28. 00:39

 

사진 출처: http://cafe.daum.net/forestguide/

물푸레나무 / 온형근

 

 

넘쳐 난 계곡물 가라앉을 때쯤

물푸레나무 잎새에서 푸른 색소가 자랄 테지

처음에는 뿜어낼 줄 몰라

퍼질러 곳곳으로 흩어졌다가

검은등뻐꾸기가 찾아와 한참을 앉아 있을 때쯤

아랫녘에서 치밀어 오른 바람이 뜨거워질 때쯤

숨 벅찬 상처

주변 나무들에게 나누질 못해

바짝 잎새를 조일 텐데

젖은 기운 잎맥으로 몰려 마른 잎새 물드는데

통통한 잎자루로 착한 시선 잔뜩 모아

눈매 시원해지는데

맑아진 계곡물 흙탕물 걸러낸 곳으로

아픈 상처 자주 떨구는 고개

손끝만 닿아도 툭 터져 쏟아낼 뭉침

저러다

터진 수액으로 당신의 무른 살점 비집고

푸른 상처로 몇 날 밤을 아파 잠 못 이루고

맑은 계곡 모두 새파래져

씻어내려면 또 몇 차례 비 쏟아져야 할지

저 빗속에서 목청 터지라 함께 소리 질러야 할지

 

- 『천년의 숲에 서 있었네』,문학의전당, 2013.

 

* 물푸레나무 껍질을 물에 담가 놓으면 그 물이 파랗게 변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물푸레라는 이름을 처음 붙인 사람은 그 나무 곁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게 틀림없다. 그리하여 숱한 나무 중에서 좀처럼 잊히지 않는 이름을 주었고 그런 연유에서인지 또한 숱한 시인들이 그 나무로부터 시적 영감을 얻고 있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한 잎의 여자,『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문학과지성사,1978)를 노래했던 오규원 시인이 있었고, “가지가 물을 파르스름 물들이며 잔잔히/ 물이 가지를 파르스름 물올리며 찬찬히/ 가난한 여인들이/ 서로에게 밥을 덜어주듯 다정히”(물푸레나무,『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창비,2004)라고 했던 김태정 시인이 있었고, “숟가락 냄비를 들고 부름켜로 들어가/ 엽서만 한 창문을 내고”(물푸레나무,『우두커니』,실천문학사,2009) 물푸레나무 안에서 살림 차리고자 했던 박형권 시인도 있었다.

  작고한 김태정 시인이 물푸레나무를 보지 못하고도 물푸레나무에 대한 아름다운 시를 건졌다면 온형근 시인은 지척에서 물푸레나무를 오랫동안 지켜봐왔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기억할 만한 또 한 편의 물푸레나무를 탄생시켰다.

  시인은 한 그루 물푸레나무가 푸른 색소를 갖는 데는 시간과 상처가 필요했음을 깨닫는다. 그 푸름은 “검은등뻐꾸기”와 무관하지 않고 “아랫녘에서 치밀어 오른 바람이 뜨거워질 때”, 그 바람에도 자신을 어쩌지 못하고 두께를 더하는 “상처”와 결부된다. 이제 상처는 “손끝만 닿아도 툭 터져 쏟아낼 뭉침”이 되고, 어느 날엔가 새파랗게 터지고 말 것이다.

  나무의, 아니면 나무를 닮은 사람의“푸른 상처”는 마냥 아프기만 한 것은 아니다. “빗속에서 목청 터지라 함께 소리 질러야 할”것을 생각하는 대목에서 문득, 영화 <러브레터>의 마지막 장면이 오버랩된다. 맞은편을 향해“오껭기데스까”외치며 그리움을 질러 내고, 상처를 치유해 가는 장면으로 이해하고 있다. 자기에게 드리운 것을, 자신이 내어놓은 것을 어떻게 씻어내는지 비 오는 날, 물푸레나무 곁으로 가볼 일이다.(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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