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자화상 / 이생진

톰소여와허크 2014. 2. 12. 12:39

 

고흐, 자화상 1888

자화상 / 이생진

 

 

자화상 40점은 부족해

평생 자화상만 그리고 싶어

얼굴만 자화상인가

해바라기도 자화상이고

사이프러스 나무도 자화상이고

책상도 의자도 고통도 의지도 자화상이고

당신을 그려도 그건 내 자화상이야

자화상을 그리는 것은

내가 나를 보고 싶어서

남들이 나를 비웃는 웃음을

남들이 내 얼굴에 뱉는 침을

닦아주고 싶어서

그리다가 구겨버리고 또 구겨버리고

그러다가 얼굴이 종이처럼 얇아지고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눈알이 빠질 것 같고

입이 마르고 혓바닥이 닳고

그럴 때마다 거울은 얼마나 이맛살을 찌푸렸을까

거울은 한 번도 나를 동정한 적이 없어

거울은 정직해서 탈이야

그걸 동정하려고 애쓴 것은 붓

붓은 나보다 고달프지

나는 지루하면 술을 마시는데

붓은 술도 못 마시고

독한 테레빈유나

딱딱한 팔레트 바닥을 핥고

남들이 나를 따뜻이 대해줬던들

나는 나만으로도 만족했을 텐데

사람들은 나를 짐승처럼 여기니

내가 나를 동정하지 않으면

나를 돌려받을 수 없어

나는 왜 이리 불쌍한가

 

- 『반 고흐, ‘너도 미쳐라’』, 우리글, 2008.

 

* 섬에 미친 시인, 또한 고흐에 미쳐 시집 한 권을 온전히 고흐 이야기로 채웠다. 시집 제목의 ‘너도 미쳐라’는 말은 어떤 대상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앎을 위한 간단하고 에누리 없는 주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고흐가 읽은 책, 고흐가 만난 사람, 고흐를 떠난 사람, 고흐의 그림과 모델을 시로 떠올리는 아름다운 시간 중에 <자화상>에 잠깐 멈춰 선다.

고흐가 자화상을 적잖이 그린 이유 중 하나는 모델비가 부족해서이지만 시인의 생각은 좀 다르다. 고흐 특유의 색채나 붓질이 잘 드러난 “해바라기”, “사이프러스 나무”, “의자” 심지어 고흐의 “고통”과 “의지”, 또 그런 마음이 반영된 모든 그림이 자화상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한다. “자화상을 그리는 것은” 스스로를 “닦아주고 싶어서”라고 밝힌 것도 주목해야 한다. 자신에 대한 외부의 비난과 몰이해에 대한 스스로의 항변과 그런 처지에 있는 자신에 대한 동정이 자화상에 담겨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고흐에게 자화상은 상처 입은 자신의 존재를 밖으로 외치고 있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인식은 화가, 시인을 포함한 모든 예술가의 자화상에 상당 부분 연관이 있어 보인다. 자신의 성장환경에서 기인한 콤플렉스나, 부당하게 주어진 외부의 틀에 좌절하기도 하고 부딪치기도 하면서 자신을 완성해 가는 게 예술의 길일 테니 말이다.(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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