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단도
- 비비안나에게 / 정철훈
난 가끔 손재주 많은 꼽추 친구를 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평생을 집시 무리에 끼어 세상을 유랑하다
폭삭 늙어버린 그런 꼽추 말이에요
바이올린도 켤 줄 알고 계집 맛도 좀 알아서
황혼녘이면 무리들 가운데서 혼자 떨어져
달을 쳐다보며 남몰래 눈물도 흘릴 줄 아는 그런 꼽추
유랑극단에서 피에로로 잔뼈가 굵고
어깨엔 우리를 빠져나온 사자에게 물린 상처가
훈장처럼 새겨진 그런 꼽추 말이에요
우리는 어느 날 한눈에 상대방을 알아보고
친구가 되는데 그 기념으로
서로의 비밀 주머니에서 빛나는 단도를 꺼내
손바닥에 십자가를 긋고 피를 섞어
의형제가 된 것을 축하하는 그런 꼽추
그렇더라도 우리가 오래 붙어 있을 운명은 아닐 테니
내 소원은 꼽추보다 먼저 숨을 거두는 것
어느 날 내가 누군가에게 칼을 맞고 죽어가고 있을 때
우리의 빛나는 단도를 꺼내 아예 목숨을 끊어놓기를
그리고 축 늘어진 내 시체를 질질 끌고 가서
문밖 급류 속에 내동댕이쳐주길
시체가 뜨지 않도록 아예 내장까지 도려내준다면
더 바랄 게 없겠지요
그렇지 않나요. 비비안나!
럼주 세 통을 따서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의 잔을 채워요
빛나는 단도가 아직 잠자고 있을 때 실컷 마셔보자고요
- 『빛나는 단도』 , (주)문학동네, 2014.
* 상처가 많은 사람, 콤플렉스가 깊은 사람은 그와 비슷한 상처와 또 다른 콤플렉스를 갖고 있는 사람으로부터 더 잘 이해받을 수 있고, 또 그런 사람끼리 더 편하게 지낼 수 있을 것이다. 생모를 일찍 여읜 꼽추 화가 구본웅과 친부모 곁을 떠나 양자로 입양되었던 시인 이상이 서로 각별하게 지낸 것도 비슷한 그늘을 가졌기 때문이 아닐까.
시인은 “손재주가 많은” 구본웅 같은, 로트렉 같은 친구가 있었으면 한다. 그리고 그 친구가 “빛나는 단도”로 자신의 끝을 마무리해 주기를 바란다. 여기서 “빛나는 단도”의 의미는 명확하지 않지만 강한 흡입력을 갖고 상상력을 자극한다. 상처 입은 영혼의 자의식 같은 걸까. 기존의 질서를 전복하려는 형가(荊軻)의 필살기 같은 것일까.
콤플렉스에 기인한 자의식이든 그걸 극복하려는 필살기든 “빛나는 단도”로 인해 어떤 경지에 가 닿는 것을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죽고 난 뒤에도 남을 최후의 명작 같은……. 그렇다면 이상의 ‘날개’나 ‘오감도’도, 실제 이상보다 더 이상답게 그렸다는 구본웅의 ‘친구의 초상’(1935년)도 빛나는 단도일 수 있겠다. 아니 그 전에 내가 쥐고 있는 펜이 빛나는 단도이기를 빌어야 하는 게 순서일지도 모르겠다. (이동훈)
'감상글(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천골 물푸레나무 숲에서 / 이상국 (0) | 2014.05.31 |
---|---|
만재도 그 사람 / 이생진 (0) | 2014.05.29 |
비명(碑銘)/ 황인숙 (0) | 2014.05.24 |
옛집 꿈을 꾸다 / 전동균 (0) | 2014.05.18 |
고욤감나무를 슬퍼함 / 나태주 (0) | 2014.05.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