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그리운 멍 / 권진희

톰소여와허크 2014. 8. 30. 09:21

그리운 멍 / 권진희

 

 

시청 근처 헌책방에서 산 책

돌아와 펴보니, 표지 뒤의 간지가 뜯겨 있다.

거기에 적혀 있었을 기명이나 날짜 따위를 생각한다.

그걸 뜯어내고 이 책을 팔았을

그 뜯김의 순간을 생각한다.

뜯겨나가도 뜯어지지 않는 자리에는

흉이 진다. 책의 흉터가

크레바스처럼 벌어져 있다.

깊고 어두운 크레바스 저 아래에서

여태 나를 바라보며 서 있는 너와

우리들 머리맡에 밤새 내려쌓이던 눈과

눈길 위에 푸른 멍 같은 발자국을 새기며 돌아서던

너를, 보내던 그날의 나를, 본다.

 

너 오래 거기 있었구나.

 

뜯어내어도 뜯겨지지 않는 생의 순간이 있다.

보이지 않으려고, 떨쳐버리려고 안간힘을 쓸 때마다

파랗게 돋아나 나를 바라보는,

그리운 멍이, 있다.

  

- 『죽은 물푸레나무에 대한 기억』, 푸른사상사, 2012.

 

  * 헌책방에서 책을 고를 때, 소유자나 증정자의 흔적이 남아 있으면 한때 가까웠다가 소원해진 사이를 보는 것처럼 마음이 불편해진다. 애초에 책을 넘긴 사람이든, 책방 주인이든 그 점을 의식해서 표기가 된 간지를 찢기도 할 텐데, 살 하나 나간 자리가 깔끔할 리 없다.

  끝내 남은 흔적을 “책의 흉터”로 보는 것은 평이한 진술일 수도 있지만 “깊고 어두운 크레바스”를 연상하면서 기억의 한 지점을 떠올리는 게 하는 것은 시적인 힘이다. 시인은 이별의 순간으로 돌아가 너를, 너를 보내던 나를 지금인 듯 만나고, 크레바스에 두고 온 날이 그 안에서 리플레이되는 상상도 하지만, 이젠 후회나 고통의 감정이 지난날처럼 오롯하지는 않다. 너와 나에게 공평하게 흐른 시간 때문일 것이고, 또 다른 관계와 일로 안간힘을 쓰게 하는 현실이 지난 감정을 느슨하게 했을 것이기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그리움이란 단어도 슬쩍 붙여 보게도 되는 것이다.

  헌책방에서 간지 찢어진 책을 발견할 때면 “그리운 멍”을 생각하는 여유 정도는 한껏 부려도 좋을 것이다.(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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