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즘나무 껍질 다 벗겨져 하얗게 빛나는 / 조용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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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도변에 서 있는 가로수 같은 이 절의 이름들을 거쳐 거울을 지나왔다
어떤 나무는 사람의 이름 같기도 한 문신을 내 몸 깊숙이 새겨놓았다
흰 테를 두른 손바닥만한 사진 속에서 흑백으로 환하게 웃고 있는 아버지
銀海寺 가는 길,
사진 뒤에 남겨놓은 글자들의 힘을 빌려 나는 하양이나 서해의 조그만 섬을 찾았다
내 나이의 아버지가 거기에서 본 것은 내 가 본 것과 같은 것이었을까
그가 다닌 길 위로 강이 물줄기를 바꾸기도 하고 산속 깊은 곳에는 암자가 생겨났다
오래고 큰 나무들 앞에 간혹 멈추어 서서 손금을 들여다보며 내게로 이어진 쓸쓸하고 긴 시간들
버즘나무 껍질 다 벗겨져 하얗게 빛나는,
내가 그리움으로 혹은 욕망으로 만들어놓은 저 먼 길
- 『일만 마리 물고기가 山을 날아오르다』, 창비, 2000.
* 시인은 메모가 남은 사진 몇 장을 들고 아버지의 흔적을 좇는 중이다. 생전의 아버지는 밖으로 돌기를 좋아하셨을까. 아버지의 흔적은 길 따라 계속 이어진다. 이 중에 몇몇 장소는 어린 화자를 데리고 다니기도 했을 것이다.
“오래고 큰 나무들 앞”이면 아버지가 그랬듯이 화자도 잠시 멈추어 선다. 버즘나무다. 버즘나무는 넓은 이파리로 소음과 매연을 흡수하기에 가로수로 많이 쓰는 나무다. 갈색이나 회색에 가까운 나무껍질이 떨어져나가면 흰 속살이 드러나는데 전체적으로 몸피가 크고 버짐이 핀 것처럼 얼룩얼룩해서 버즘나무란 불린다. 시인은 나무에 손을 대어보기도 했을 것이다. 아버지로부터 “내게로 이어진 쓸쓸하고 긴 시간들”을 느끼는 순간이다. 이제, 화자는 아버지 대신 길에 있다. 이 길은 유전으로 혹은 “그리움”으로 생긴 길이지만 또한 스스로 “욕망”해서 떠난 길이기도 하다.
은해사 가는 길은 은해사 이름부터 해서 흰 테, 하양, 버즘나무 껍질 속까지 온통 하얀색이다. 은해사에 보관 중인 편액 글자 ‘불광(佛光)’도 검은 나무판에 흰색으로 큼직하게 새긴 추사의 글씨다. ‘불’의 세로획 하나가 유난하게 아래로 아래로 길게 뻗쳐 있는데 불심을 아래로 펴라는 의미로 새겨도 그만이지만, 불(佛)과 속을 떠나 다음 또 이다음으로 이어지는 인연의 줄에도 생각이 미친다.
길가 나무 하나에 기대어 인연 있는 사람을 생각하는 내면의 여행, “하얗게 빛나는” 길로 떠나는 시간 여행에 같이 나서서 살짝 들뜨고 싶다.(이동훈)
사진 출처: http://cafe.daum.net/ivoworld/3Oia/923?q=%BA%D2%B1%A4%20%B1%E8%C1%A4%C8%F1&r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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