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 넝쿨 아래 / 이영혜
영동 학산 산비탈 포도밭
넝쿨마다 휘늘어진 송이송이에 손끝을 대니
왜 내 젖이 찡해지는지 몰라
막내 동생 젖 먹이던 젊은 엄마
탱탱해진 젖무덤이 떠오르나 몰라
넝쿨손처럼 퍼렇게 핏줄 선 젖꼭지에서
아기 입안으로 흘러들던 엄마의 진액
그 오래된 기억 속의 즙이
왜 자꾸만 내 입안에 고여 오는지 몰라
부끄러워 커다란 이파리로 하늘을 가리고
아래로 늘어진 장엄한 저 포도엄마 행렬!
뿌리에서부터 꿈틀꿈틀 휘감아 오른 줄기줄기들
그 핏줄로 달다단 젖 뻗쳐올라 와
터질 듯 하얀 분 배어 나오는
먹빛 알들에 입술을 대면
내 마른 유선에도 다시 젖이 도는지
왜 이리 아랫배부터 점점 뜨거워지나 몰라
초가을 포도 넝쿨 아래 서니
왜 이리 푹푹 엄마의 단내가 나서
나, 축축하게 부푸는지 몰라
- 『식물성 남자를 찾습니다』, 천년의시작, 2014.
* 영동역에 내리면 흔히 볼 수 있는 등나무 벤치 대신에 포도나무 벤치가 있다. 포도가 많이 나는 지역 특성을 반영한 것일 텐데, 그늘에 쉬었다 가면서 철을 잘 만나면 입이 호강하기도 할 테니 벤치마킹(?)하면 어떨까 싶다.
포도송이는 젖 모양을 닮았고, 그 송이송이는 젖에 매달린 자식 같은 것이니 포도나무에서 어머니를 유추한 것은 자칫 익숙한 틀을 되풀이할 우려가 있지만, 시인은 포도알처럼 매끈하고도 활력 있는 언어로 이를 불식시키고 있다. 유전하는 모성을“아랫배부터 점점 뜨거워지”고 “축축하게 부푸는”일로 감각적으로 구체화시킨 점이 그러하다.
포도나무는 겉보기에는 줄기도 가늘고 껍질도 버석한 느낌을 주는데, 그 몸으로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는 비슷한 조무래기들을 다 안아서 키운다. ‘포도 넝쿨 아래’에 가면 한 송이의 자식들을 건사하기 위해 젖을 내고 젖을 돌게 하는 일이 얼마나 고단할지에 대해서 먼저 생각할 일이다. 한 입의 달콤함은 그 다음이다.(이동훈)
'감상글(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팔육 선생 / 김부회 (0) | 2014.10.17 |
---|---|
평양냉면 / 신동호 (0) | 2014.10.15 |
바람과 다투다 / 백무산 (0) | 2014.10.06 |
버즘나무 껍질 다 벗겨져 하얗게 빛나는 / 조용미 (0) | 2014.10.01 |
떡가루비 내리는 한가위 / 김금용 (0) | 2014.09.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