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슈퍼 가는 길 / 박일환
동네슈퍼가 발을 동동 구른다
대형마트 때문에 죽겠다고 울상을 짓는다
덩치 큰 놈들만 먹고 살라고 할 수는 없지
나라도 동네슈퍼를 애용해야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충남슈퍼만큼은 가고 싶지 않았다
자주 드나들던 단골은 아니지만
소설 쓰는 인휘 형하고
캔맥주를 사서 마시기도 하던 그곳
주인하고 싸운 것도 아니고
물건 값이 비싸서도 아니지만
다시는 찾을 일이 없기를 빌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기쁜 마음으로 가야겠다
가산디지털단지 역에서 마을버스 03번을 타고
충남슈퍼 앞에서 내려달라고 해야겠다
공장 앞 컨테이너에서, 경비실 옥상에서, 포클레인 위에서
1895일 버틴 기륭전자 여성노동자들이
마침내 공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됐다며
승리보고대회란 걸 한다고 하니
가서 막걸릿잔이라도 함께 부딪쳐야겠다
언제나 막막하고 슬프고 화가 나던
충남슈퍼 가는 길
안녕, 이제는 안녕!
한껏 유치해져도 좋을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고 와야겠다
- 『지는 싸움』, 애지, 2013.
* 파견 비정규직에 대한 해고로 시작된 기륭전자의 쟁의는 1895일(6년)을 이었다. 이후 합의가 지켜지지 않고 여성 노동자들이 다시 길로 나섰지만 끝내 일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간의 안간힘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거대한 벽 앞에 분노하기도 하겠지만 낭패스런 처지에 무력해지기도 할 것이다. 힘이 있거나 힘을 쓸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노동 유연화 정책이니 시장 경쟁력이니 하는 것만 섬길 뿐 고용 불안으로 행복할 권리를 앗기는 비정규직의 처우 개선에 인색한 것이 분명한 만큼 제 2의 기륭이 걱정되는 현실이다.
‘지는 싸움’이라 해서 기륭의 6년 혹은 그 이상이 소득 없이 허비한 것만은 아닐 테다. 지는 싸움을 하는 사람이 있어야 가진 자도 눈치를 보게 되고, 지는 싸움을 하는 사람이 있어야 힘 있는 자도 신중하게 된다. 지는 싸움을 하는 사람이 있어야 다수의 침묵하는 사람도 언제든 싸움에 기어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시인은 이 ‘지는 싸움’에 동참했거나 응원을 보내고 있다. 누구는 연행되어 가고, 누구는 컨테이너에서 겨울나고, 누구는 포클레인 위에서 떨어지기도 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인근의 충남슈퍼에서 그들의 투쟁, 그들의 설움과 연대하며 막걸릿잔을 비웠을 것이다. 더는 그러지 않아도 되는 상황을 기뻐하며 충남슈퍼에 “안녕”을 고하지만, 결국 안녕하지 못한 현실을 살고 있다.
현재, 충남슈퍼는 편의점으로 바뀌어 사라졌다고 한다. 비정규직의 배고픔도(정택용 다큐사진집 사진 속 문구-"비정규직은 배고픔이다"), 내일을 알 수 없는 불안도 다른 무엇으로 바뀌어 덜어지거나 사라지면 좋을 텐데, 갈 길이 멀다.(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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