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가죽과 이빨 / 황병승

톰소여와허크 2015. 1. 18. 20:44

가죽과 이빨 / 황병승

 

사랑과 헌신을 전면에 내세우고 돌아서는 즉시 파기하며 악의에 차 봉사하고 극기를 비웃으며 재활의지를 꺾고 좀먹게 하고 자신의 진정한 노예로 태어나 모든 형제자매들의 잔혹한 주인으로 군림하며 오로지 타인을 짓밟을 때에만 의지를 불태우고 조용히 단호하게 음탕한 정신을 찬양하며 성심 성의를 다해 술과 약물에 의존하고 열렬히 과거에 집착하고 화해를 원하며 입구를 투쟁을 요구하면 출구를 봉쇄하고 정당화하고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외치며 타인의 자유를 강력히 구속하고 체력을 과시하고 난장판을 사랑하며 뒷거래에 주력하고 악착같이 살아남아서 위중한 몸으로 이를 악물고 악착같이 살아남아서 모든 형제자매들에게 끝없이 요구하고 뭉개고 뭉개고 앉아서 자신을 향한 경멸에 찬 시선을 모조리 무시하며 기침으로 끝없는 기침으로 회피하며 입속에 고인 가래가 기도를 막을 때까지 조용히 그리고 단호하게 마지막 숨통이 끊어질 때까지

*

  셰퍼드가 사람을 구분하는 데 3초…… 너무 길다

 

- 『육체쇼와 전집』, 문학과지성사, 2013.

 

 

  * 사람이 입고 쓰는 것으로서 가죽과 이빨은 짐승의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가죽과 이빨은 자기를 위하는 본능에 가장 충실한 도구로 사용될 것인데 위 시에 묘사된 인물이 지극히 그렇다. 그가 내세우는 “사랑과 헌신”이나 “화해”도 형식적인 제스처에 불과할 뿐 시종일관 자기 마음대로, 그야말로 “악착같이” 자기를 위한다.

  남이 받는 고통, 남이 보내는 시선에 전혀 관계하지 않는 사람을 역시 남 보듯이 대하면 그만일 것이나 결코 남일 수 없는 사이(‘가죽’을 ‘가족’으로 바꾸어 읽어도 무방해 보인다)거나 , 가까이 지속적으로 부딪쳐야 하는 경우라면 그 피해나 내상이 상당할 것이며 삶 전체를 우울하고 어둡게 만드는 후유증도 있을 것이다.

  조그만 위안이라면, 어둠이, 화자로서는 어쩔 수 없는 어둠이, 화자를 통째로 잡아먹는 데 실패할 것이고 어둠을 이해하는 눈과 마음의 힘을 키워줄 것이라는 기대다. 그래서 더 매력적인 가죽을 갖고 더 센 이빨을 갖지 않겠냐는 거다.(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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