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골목길 / 최은묵

톰소여와허크 2015. 1. 26. 18:59

골목길 / 최은묵

 

 

쪽창들 액자처럼 걸린, 골목

굽은 길에서는 빛도 구부러져요

응달은 어디서나 쉽게 자라죠

 

골목 어귀 우산집 할아버지 종일 휘어진 빛을 수리해요 주문을 외우듯 바느질할 때마다 웅얼거려요 이따끔 큰길 사람들 빛의 소리를 알아듣는 할아버지를 찾아와 수선을 맡기지만, 여기 있는 햇살은 전부 골목길 부품이라 고칠 수 없어요 우산꽂이에 서 있는 낡은 우산, 꿰맨 자리마다 듬성듬성 빛이 새고 있네요

 

응달에 사는 것이 죄인 줄 몰랐으니, 나는

골목길에서 손이 트도록 구슬치기를 했고

담 밑에 쭈그리고 앉은 햇살 곁에서 실연을 말리기도 했어요

구구단 외우듯 암기한

눈감고 더듬지 않아도 너무 쉬운 길

할아버지가 골목길을 차지한 시간은

내가 스쳐 지나간 걸음의 몇 배쯤 될까요

 

내일이면 오래 앉아 뭉그러진 의자를 골목 그늘에 남겨두고 떠나는 할아버지

이제 쪽창 불씨는 누가 고쳐줄까요

한낮을 느릿느릿 쪼개 먹던 처마 밑 제비 새끼들은 누가 보살필까요

햇빛 수선할 곳 잃은 집집마다 낙인처럼 그늘을 찍고

골목엔 다시 어둠이 자라겠지요

 

문상객들 소리 한꺼번에 빠져나가기엔 너무 비좁은 골목길

쪽창 열고 펼친 우산에서 빛들이 뿌려집니다

모처럼 골목길이 환하게 북적입니다

 

- 『괜찮아』 , 푸른사상사, 2014.

 

 

  * 벽화 골목, 근대화 골목, 김광석 거리처럼 골목의 가치에 주목하여 문화적 위상을 높이고 상업적 이익도 꾀하는 골목 특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골목은 가난한 사람들의 집결지며 방향과 전망과 통풍을 가리지 않고 다닥다닥 붙은 집들과 좁은 통로로 인해 응달진 곳도 적잖다. 이삿짐 용달차 부르기도 쉽지 않은 이곳을 하루바삐 뜨는 게 출세라고 생각할 만하다.

  그런 골목의 주민인 “우산집 할아버지”는 슬하의 자식 손자 또 그 벗들에게 햇살 수리공 같은 존재다. 어둠을 통해서 빛의 구멍을 선명하게 인식하듯이 구멍 난 우산이어야 햇살이 뿌려질 텐데, 응달과 어둠에 익숙하지 않은 멀쩡한 “큰길 사람들”에게 할아버지의 기술이 통할 리 없다.

  시인은 골목의 한 세대가 할아버지의 죽음으로 끝나가는 걸 슬프게 또 환하게 추억한다. 골목길 쪽창들이 할아버지를 배웅하며 빛을 발하는 인상적인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골목에 빚진 사람의, 골목에 대한 헌사로 읽어도 좋을 것이다.(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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