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몽유도원을 사다 / 성선경

톰소여와허크 2015. 3. 20. 14:45

 

안견, 몽유도원도

 

몽유도원을 사다 / 성선경


백화점에 들렀다 복숭아통조림 한 박스를 샀다.

이 복숭아 철에 웬 통조림이냐는 아내의 핀잔을 들으며

내 마음의 무릉도원 한 세트를 들고 신이 났다


아홉 살이던가 열 살

나는 홍역을 앓아 펄펄 열이 끓고

사흘 동안 미음 한 모금 넘기지 못하고

어머니는 설탕물을 끓여 숟가락으로 떠먹이고

먹는 족족 나는 게워내고


할머니는 이러다 우리 장손 큰일 나겠다고

쌀됫박을 퍼다주고 사오신 복숭아통조림

나는 꿈결인가 잠결인가 언뜻언뜻 도원(桃園)을 거닐며

따먹은 기억이 생생한 부귀복록의 천도(天桃) 복숭아


아내는 한참 동안 제철 과일 이야기로 바가지를 긁고

나는 아이들에게 들려줄 이야기 생각에 미리 즐겁고


나는 몽유도원 한 세트를 샀다.


-『몽유도원을 사다』, 천년의시작, 2006.


* 안견의 몽유도원은 안평대군의 꿈을 그린 것이다. 도원의 주인이고 싶은 안평대군의 바람과 거기에 기대고 싶은 여러 신하들과 화가 자신의 욕망까지도 그림 속에 뭉근하게 끼어 있을 것이다. 반면에 시인이 그리는 몽유도원은 지극히 평범하고 사적이이서, 별쭝난 꿈이 끼어들 여지가 더욱 없기는 하지만 그럴싸하게 보이는 건 안견의 그림 못지않다.

시인의 몽유도원은 복숭아통조림으로부터 연상되어진 것이다. 병으로 위중한 상황에서 저쪽 세상으로 건너가지 않고 이 세상으로 돌아온 건 온전히 어머니와 할머니의 정성 때문이다. 특히나 할머니가 먹여준, 당시로서는 귀했을 복숭아통조림이 도원을 꿈꾸게 하고 기운을 돋운 것이니 그때를 생각는 것만으로도 아늑해지는 기분일 테다.

말하자면 몽유도원의 비밀은 할머니 사랑이다. 그 비밀에 닿으면 복숭아통조림은 어느새 도원의 나무 열매가 되는데 시인은 서두르지 않고 아이들부터 이 도원에 들일 생각이다. 가공식품이 아닌 제철 과일을 주장하는 아내는 몽유도원에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지만 나중에라도 말고삐 잡는 역할 정도는 주지 않을까 싶다.

설령, 통조림 한 세트 아니 한 깡통도 얻지 못하여 도원의 꿈이 미뤄진대도 시인이 서운해 하지는 않을 것이다. 안견의 몽유도원과 다르게 언제든 불러낼 수 있는 꿈이고, 열 번이라도 기분 좋게 다시 쓸 수 있는 꿈이니 말이다.

이제, 몽유도원을 사러 일본에 갈지, 동네 슈퍼에 갈지 고민할 게 아니라, 내 안의 몽유도원을 어떻게 끄집어낼까를 궁리해봐야겠다.(이동훈)


'감상글(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두엄 / 성명진  (0) 2015.03.29
문 밖의 말 / 채들  (0) 2015.03.26
겨울 창가에서 / 남대희  (0) 2015.03.19
동행 / 조삼현   (0) 2015.03.11
이카로스 302호 / 정훈교  (0) 2015.03.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