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밖의 말 / 채들
평생 추위에 떠는 말이 있다면
집도 절도 없다는 말이 아닐까
집 비워줘야 할 날은 바짝 다가오고
전입할 주소지는 아직 찾지 못해 도시의 외곽을 도는데
오후의 찌푸린 날씨가 눈발을 친다
언강에 맨발의 철새들
새들의 가장 따뜻한 집은 부리를 물고 있는
제 목덜미가 아닐까
새들의 가장 추운 곳이 부리인 것처럼
떠나야 할 집안엔 부리 같은 세간들이 들떠 어지럽게 놓여있다
한 곳으로 들어왔다 한 곳으로 나갈 것들
접시는 접시들끼리 옷가지들은 옷가지들끼리 모여있다
부리를 묻고 있던 날들에서는
늘 부족이던 세간들이
떠날 채비를 하는 동안에는 왜 이리 많은지
시집 올 때 같이 온 그릇 세트 중
깨지고 이 빠지고 남은 몇 개의 접시 중 하나처럼
세간들에 끼여 있는 한 가족도
날짜 지난 신문지 쪼가리를 물고 달그락거린다
흐릿한 내일의 주소지를 떠올리며
언 부리를 녹이는 밤
문 밖에는 이빨 빠진 별들이 꽁꽁 얼어있다
- 『허공 한 다발』, 불교문예출판사, 2015.
* 새의 부리는 다른 곳보다 체온이 높게 감지되며 몸의 열을 조절하는 기능이 있다고 한다. 기온이 떨어지는 겨울철에 부리를 죽지에 파묻거나 아예 남쪽으로 이동하는 것도 이와 관련 있어 보인다. 또한 새의 부리는 먹고사는 생업의 전방에 있으면서 주변 상황에 반응하며 늘 ‘달그락거려야’ 할 운명을 갖고 있다. 그러니 “새들의 가장 추운 곳이 부리”라는 말은 실제 부리의 온도와 관계없이 설득력이 있다.
이사를 앞둔 시인은 초라한 세간과 새의 부리 그리고 한 가족을 연결시킨다. “전입할 주소지”에 더 나은 기대를 걸기 어려운 상황에서 당면한 오늘도, 닥쳐올 내일도 추위 속에서 ‘달그락거려야’ 할 처지라는 것이다. 세간을 닮아, 또 가난한 사람을 닮아 “이빨 빠진” 별, 그 별이 세상 위로 꽁꽁 얼어있대도 마냥 시린 느낌만은 아니다. 고단한 일상 속에서도 “언 부리를 녹이는” 마음결이 문 밖으로 새어나가 집집의 온도를 올리기도 할 테니까.(이동훈)
'감상글(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빈 잔 / 박동남 (0) | 2015.04.04 |
---|---|
두엄 / 성명진 (0) | 2015.03.29 |
몽유도원을 사다 / 성선경 (0) | 2015.03.20 |
겨울 창가에서 / 남대희 (0) | 2015.03.19 |
동행 / 조삼현 (0) | 2015.03.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