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잔 / 박동남
그는 동박새
첫사랑 그녀가 살고 있다는 여수엘 왔다
어디에 사는지 몰라도
같은 하늘 같은 땅에 있는 것이 좋다
그녀가 숨 쉬는 곳에 나도 숨 쉬고 있어 좋다
눈이 내린다
같은 눈을 맞는 사실이 좋다
한 번도 와보지 않은 이곳이 낯설지 않다
그녀는 원색 옷을 즐겨 입고 동백꽃처럼 웃었다
얼마나 돌아가야 만날 수 있을까
물도 바람도 남으로 흐르고 사랑의 숨결이 느껴진다
절벽 같은 사랑 매서운 추위 같은 일도 나를 위해
걱정을 덜어주던 그녀
그녀와 나는 한겨울 꽃과 나비
동백꽃 그녀는 더 활짝 웃는 사랑
꽃가루 젖은 동박새는 향기 가득하다
그녀를 닮은 꽃들이 겨울 끝자락에 서서 목을 꺾을 때
그는 겨울을 찾아 돌아가지만
언젠가 만날 것을 점쳐보는
첫사랑은 평생 가슴 한 쪽에 담아 두고 사는 일이다
- 『볼트와 너트』, 우리시진흥회&도서출판 움, 2015.
* 전남의 여수시는 물 좋은 동네라는 麗水를 쓰지만, 왠지 낯선 곳을 떠도는 나그네의 감정인 旅愁를 떠올리게 되고 그만큼 더 끌리는 데가 있다.
나그네로 여수에 와 동백 군락지를 찾은 시인은 첫사랑을 생각한다. 한때의 사랑을 여전히 아름답게 추억하고 그리워하지만 원망이나 후회는 없다. 사랑이 과거의 한 시점에 붙박이어 있지 않아서다. 현재로 이어지는 사랑 혹은 그럴 가능성이 있는 사랑이거나 아니면 시간이 꽤 흘러 다른 사랑이 자리 잡고 있을 것도 같다. 어찌됐던 동박새가 동백꽃을 탐하듯 사랑하지 않고 살 수는 없는 일이다.
왔다가 떠나는 동박새 입장에서는 동백꽃이 자기만 바라보며 “걱정을 덜어주”고 “더 활짝 웃는 사랑”임에 분명하나, 동백꽃 입장에서는 자기의 전략에 말려든 동박새를 걱정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래도 사랑으로 살고 사랑으로 밥 먹는 일이 바뀌는 건 아니다.
언제 여수에 가면, 동백꽃의 이야기를 받아 적고 빈 잔에 꽃씨라도 받아와야겠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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