껍질 / 박미라
껍질 벗는 것들끼리 모여 사는 자작나무 숲
어느 쪽을 향해도 앞을 막아서는 벗은 나무들 앞에서
열아홉, 스물, 서른둘,
……숨을 고른다
입술 붉은 저녁이 잠깐 다녀가고
몸집 큰 어둠이 나비처럼 내린 후에도
나무들 잠들지 않고 껍질을 벗는지
낮은 비음이 들리는데
속살에 그어진 실금 어디쯤에 한 줄 주소가 적혀 있을 테지만
스스로 껍질을 벗고 맨몸으로 서 있는
단단한 다짐을 쉽게 어길 것 같지 않아
가만히 속살 어루만진다
실금을 벗어난 글자들이
껍질에 묻어나지 않고 살 속으로 파고드는 걸
못 본 척, 백자 빛 껍질만 어루만지는
달의 손등에 구름 그림자가 무성한데
먼 데 등불을 당기듯 마음 천천히 환해진다
자작나무가 바람의 방향 따위 간섭하지 않으며
자꾸만 껍질을 벗는 것은
옛 주소 같은 건 그만 버리려는 것이다
살점에 각(刻)을 떠도
지워지지 않는 주소가 있다는 걸 모르는 것이다.
- 『우리 집에 왜 왔니?』, 푸른사상사, 2014.
* 자작나무 껍질은 변형이 적으면서도 껍질 안의 기름기로 인해 오래가는 성질이 있다. 천마도 그림이 천년을 이어온 비결이 여기 있다. 유난히 하얀 수피로 인해 여름 산에도 겨울 산에도 눈길을 확 끄는 도저한 매력이 있다. 자작나무 껍질에 연서를 써서 보내면 그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속설이 널리 퍼져 있기도 하다.
그러니 시인이 사랑을 한 줄 언급하지 않아도 자작나무에서 사랑의 이미지가 겹쳐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껍질 같은 건 아예 버리겠다고 다짐하는 순간에도 사랑의 흔적은 속을 파고드는 것일까. 지난 사랑이나 그때의 고착된 생각을 떠올리게 하는 “옛 주소”일랑 껍질 버리듯 해야 하는 것일까. 껍질을 버리는 행위가 속을 더 새뜻하게도 하고, 더 단단하게도 했을 것이지만 그럼에도 온전한 버림은 애초에 가능하지 않은 모양이다. 품고 버리는 되풀이 과정에 속살과 함께 껍질을 어루만지는 여유를 갖는 것도 자아의 성숙함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제 껍질도 ‘나무’임을 부정해서는 안될 것 같다. 껍질이 속과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속이 우러나오는 존재의 얼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