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귤 / 이무원

톰소여와허크 2015. 5. 6. 17:55

 

- 서하일기․80 / 이무원

 

 

“이것은 서하 먹고

이것은 할아버지 먹고”

냠 냠 냠

(먹다 보니까 귤이 한 개 남았다)

“서하야, 이 귤은 누가 먹을까?”

“이럴 땐 가위 바위 보를 하는 거야, 알겠지”

“그거 좋겠다”

“그런데 서하가 지면 다시 하는 거야.” 서하가 토를 단다

(서하는 가위 할아버지는 바위)

“하버지가 이겼네”

“서하가 지면 다시 하는 것이라고 말했지”

(이번에는 서하가 제일 잘 내는 가위를 생각해 하버지는 보를 낸다)

“서하가 이겼지. 이것은 서하 꺼야”

(우쭐대며 귤을 집어든 서하)

“이거 두 개가 쌍 붙었네.

할아버지

우리 사이좋게 나누어 먹자”

“고마워”

 

- 『서하일기』, 다층, 2004.

 

 

  * 사랑은 내리사랑이라 했듯이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보다 큰 것은 없을 줄 안다. 시인은 할아버지의 자격으로 한 단계 건너 내리사랑에 나선다. 그 사랑 이야기를 『서하일기』로 엮었으니, 이 시집은 할아버지가 서하에게 준, 어쩌면 서하가 할아버지에게 준 것이기도 한, 그래서 서로에게 고마운 선물 그 자체다. 이 시를 읽는 독자도 감사하게 떠올리거나 소중하게 기억되는 저마다의 인연이 머릿속에 펼쳐질 것이니 스스로도 선물 꾸러미를 챙겨든 마음일 것이다.

  서하에게 할아버지는 “수염 난 꽃”이다. “하버지 메롱”하며 장난치다가 “나는할아버지를제일사랑해요”라며 구름을 태우기도 한다. 할아버지는 그런 서하를 천사로 생각한다. 천사는 자신을 위하고 지는 걸 아주 싫어한다. 가위 바위 보에서 이겨야 하고, 귤도 자신이 먼저 먹어야 한다. 천사는 그런 자격이 있다. 할아버지는 이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천사가 시키는 대로 한다. 할아버지의 절대적 지지와 사랑 속에 천사는 천사답게 나누어 먹는 인정을 보여준다. 어릴 때 사랑을 받고 성장한 아이가 어른이 되어서도 자연스레 사랑을 표현하고 실천한다고 하지 않나. 역으로 결핍된 사랑, 인색한 신뢰 속에서 성장한 친구는 적잖은 어려움을 겪으며 사랑을 배워야 할 줄 안다. 그러고 보면, 서하는 시인의 귀한 손녀이면서 동시에 사랑 받아 마땅한 이 세상 모든 어린이의 이름이라고 여겨도 좋지 않을까 싶다.

  몇 해 전, 사석에서 시를 읽은 티도 낼 겸 해서 시인께 성장한 서하가 여전히 예쁜지 물은 적이 있다. 그때 시인은 서하 이야기만 듣고도 아이처럼 환하게 웃는 표정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무원 시인은 이제 없는 사람이 되었지만, 서하의 마음속에 오래오래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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