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추운 날에는 / 오민석
이렇게 추운 날에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카페 도스토예프스키로 가서
쏘냐를 만나고 싶다
보드카를 마시면서
혁명이 어디쯤 왔냐고 묻고 싶다
백야로 어두운 밤 저만치
혁명이 머뭇거리고 있으면
들어와 한잔하자고 하고 싶다
잊힐 애인이라면
목젖을 넘기는 뜨거움이라도
알아야 하지 않느냐고
쏘냐의 낡은 외투에 얼굴을 묻고
얼어붙은 생계에 대하여
말하지 말아야지
가스등 희미하게 켜지는 십자로에서
라스콜니코프처럼
대지에 엎드리지 말아야지
키스하지 말아야지
이렇게 추운 날에는
쏘냐에게 따뜻한 국밥 한 그릇
사 주어야지
몰래 쓴 편지를 보여주며
얼어붙은 손등의 희망을 말해야지
김칫국물 흘리거든
슬픈 육체에 대하여 말하지 않고
조용히 웃어야지
쏘냐의 등 뒤로 백야의 어둠이 지면
몸 팔러 가는 심청이처럼
먼 훗날의 광야를 기약해야지
- 『그리운 명륜여인숙』, 문학의전당, 2015.
*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도스토예프스키가 성장한 곳이며, 이곳 뒷골목이 <죄와 벌>의 배경이 되었다고 한다. 시인은 소설의 무대를 다니며 작가와 소설 속 인물과 만나는 기회를 가졌음직하다. 문청 시절 쏘냐와 카츄사는 밤하늘 별빛 같은 존재였을 텐데 옛애인의 흔적을 찾는 마음이 꽤나 낭만적이었을 것이다.
소설 속 라스콜니코프는 쏘냐가 시키는 대로 대지에 키스하며 새롭게 거듭나려 했지만 시인은 그러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가볍든 무겁든 죄야 없을까마는 죄를 빌고 죄를 사하는 의식 대신에 보다 현실적인 선택을 한다. 고생하는 쏘냐를 위해서 “따뜻한 국밥 한 그릇”사고 싶다는 것이다. 연인과 국밥을 말면서 “얼어붙은 생계”에 훈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일 테다. 생계를 위해 길거리로 나온 쏘냐의 막막했을 삶, “김칫국물 흘리”는 “슬픈 육체”에 대한 깊은 연민이 느껴지지만 시인은 먼 훗날을 기약하는 낭만주의자의 면모를 잃지 않는다. 회개한 라스콜니코프보다 고민하는 라스콜니코프가 인간적일 텐데, 그가 쏘냐에게 한번이라도 국밥을 사 주었는지 궁금하다.(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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