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 / 최돈선
깔깔깔 비어 있는 저녁 강이 웃는다
잊지 말라고 그렇게 웃는다
바람에 실려
어둔 마음 뒤꼍을 돌아
담배를 피워 문 굴뚝이 웃는다
펜촉을 부러뜨린 시인이 벌판에서
외로운 눈빛으로 웃는다
둥지에서 떨어진 새가 반짇고리만 하게
따라 웃는다 부끄럽게 웃는다
버드나무 우물에 눈썹 빠뜨린 새벽달도
시퍼렇게 날 세워 웃는다
맨발로 돌아와 보랏빛 잠이 든
아버지의 흐르는 하늘이 차게 웃는다
눈이 빨간 토끼가 웃는다
족제비가 담 밖에서 닭장을 기웃거리며 웃는다
사분의 일 음표씩 쓰러진 풀들이
아무렇게나 웃는다.
뻐꾸기 울음 하나 놓아 둘 자리 없이
쓸쓸한 목메임 홀로 뉘인 채
바람아 어디론가 떠나는
어느 등성이의 연으로나 헤매이며 웃는다
뿌리 뽑힌 잡돌이 되어
뒤채이는 인생으로 웃는다
수염 없는 사랑을 아파하며
모두들 잊지 말라고 그렇게 웃는다
-『나는 사랑이란 말을 하지 않았다』, (주)해냄출판사, 2011.
*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안톤 슈나크)’에서 수학 교과서가 눈에 띄어 내가 공감했듯이 슬픔의 목록을 자신의 것과 견주어 수용하기도 하고 더 보태기도 하면서 이 수필이 지금껏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줄 안다. 시인은 슬픔 대신 웃음의 목록을 제시한다. 슈나크의 슬픔 목록엔 쉽게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시인의 웃음 목록엔 조금밖에 못 웃는다. 뒤로 갈수록 쓸쓸함과 슬픔의 그림자가 언뜻언뜻 비치는 듯해서이다.
“뻐꾸기 울음 하나 놓아 둘 자리 없이”에서 생활의 거처든 내면의 마음자리든 여유를 갖지 못하는 상황이 떠올려진다. 또 한편 “어느 등성이의 연”(鳶으로 읽어도 좋고, 緣으로 읽어도 그만이다)으로, “뿌리 뽑힌 잡돌”로 헤매고 방황하는 모습을 그렸으나 그 자체로 자유, 자족하는 듯한 인상도 없지 않다. 이 점은 뒷글에서 동반 자퇴생 이외수가 평한 시인의 이력에서 짐작되는 바 있으니, 시는 방황하는 고만큼, 고민하는 고만치의 결정체라는 말을 실감한다.
시인은 “수염 없는 사랑”으로 아픈 가운데도 웃음을 위해 끝까지 노력한다. 수염 없는 사랑을 수염 없는 여성으로 생각하든지, 까끄라기 없는 밋밋한 사랑으로 생각하든지, 수염에 대한 그리움으로 혹은 시기로 생각하든 간에 아무튼 읽는 입술은 웃는 모습일 테다. 누군 슬픔을 모르는 웃음을 믿지 않는다고 하지만 - 그 말을 딱히 부인하고 싶은 것도 아니지만 - 인생은 모르고도 웃을 수 있으면 좋은 거다. (이동훈)
* 사진은 작정하고 꾸민 집안 인테리어임^^
웃는 얼굴이 참한, 이순구의 <웃는 얼굴>
친구 가방 들어주던 막내를 위한 이오덕의 <꿩>
첫째가 어느 날 갑자기 말도 안되게 (외워서) 읽기 시작한 <말도 안돼>
동생 팔고 싶어 했던 첫째를 위한 임정자의 <내동생 싸게 팔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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